김임순 수필가

소녀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구릿빛 쇠 옷을 입고 성글게 손뜨개질한 털목도리를 두르고 앉았다. 곁에 놓인 빈 의자는 누구를 위해 비워두었는가. 노랑나비만 청산을 찾아 바다를 건너온다. 

봄날이 저리도 따뜻한데 맨발로 한데 나앉은 소녀가 애처롭다. 어깨에 내려앉은 새를 파랑새라고 부르지 않으련다. 소녀를 태우고 구만리를 날아다니게 붕새였으면 좋겠다.   

누군가 소녀에게 꽃을 선물하고 갔다. 오뉴월 땡볕에도 시들지는 않고 눈이 내려도 얼지 않는다. 꽃을 갖다 바친 소녀는 3교시 역사(歷史)시간에 소녀를 만났을 것이다. 검정치마, 하얀 저고리. 초경 치른 또래쯤의 소녀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소녀가 내려다보는 바다에 유람선이 떠있다. 여학생들이 유람삼아 섬으로 소풍을 왔다. 꽃 머리핀을 꽂고 도시락을 까먹으며 깔깔거린다. '저도 갈래요. 어머니 손잡고 아버지 목마 타고 꽃놀이 갈래요.' 

연극이 끝나고 암막 커튼이 내려졌다. 나는 어둡고 긴 회랑을 돌아 소녀의 동상을 찾아간다. 눈물 훔치던 손수건으로 마른세수를 시킨다. 그림 그리는 재주라도 가졌더라면 손등에 나비 한 마리라도 그려주고 싶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인제 와서야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 말만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울 것만 같다. 

너무 일찍 철이 든 소녀는 배를 타고 남의 나라로 건너갔다. 자발적으로 간 게 아니라, 꽃놀이 동산에도 데려가고, 돈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어른들은 거짓말을 안 하는 줄 알았다. 가난한 집안에 입 하나 덜어내려고 멀미를 해가며 배를 타고 갔다. 꽃구경 시켜주겠다던 어른들 말은 말짱 거짓부렁이였다. 소녀를 데려간 곳은 군인들이 거주하던 막사였다. 가림막 쳐진 곳에는 군인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있었다. 

위안소 우두머리 여자는 저승사자만큼 무서웠다. 총총 땋아 댕기를 묶었던 머리카락을 무쇠 가위로 아무렇게나 잘라버렸다. 그 대가로 일본 이름을 하나씩 지어주었다. 머리카락을 잘랐던 가위로 임신해버린 또래들의 탯줄을 잘랐다. 지은 죄도 없는 데, '사쿠' 피임약 606 매독 주사를 놓았다. 고향에 돌아가도 어머니가 단발머리 소녀를 알아보지 못할까봐, 돌아올 수도 없었다. 아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아 모란이/ 아~아 동백이/바람에 날리는 저 꽃잎 속에 내 사랑도 진다"

고향의 강물에 띄워 보내는 '흐르는 편지'와 '오직 한 사람'이라는 위안부 소설의 책장을 덮는다. 페이지마다 기록된 그 소녀들의 모습이 하나둘 떠오른다. 

오늘도 소녀는 입을 닫고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가끔 소녀 앞에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는 남학생도 있다. 그게 역사를 올바로 보는 자세요, 마땅히 해야 할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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