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가까이 있는 일제강점기·6.25한국전쟁 상흔을 따라서
도심 가까이 있는 일제강점기·6.25한국전쟁 상흔을 따라서
  • 이남숙 기자
  • 승인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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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다크투어리즘4]취도 기념탑∼다나까농장∼포로수용소의 아픔과 교훈
불행한 치욕의 역사라고 무조건 뭉개는 것은 '하책'
아픔의 역사일지라도 교훈으로 승화시키면 '상책'
계룡산 통신대에서 바라본 옛 거제시내 모습.

도심 가까이 전쟁의 상흔을 따라 사등·연초면과 고현·수월동의 다크투어리즘의 길을 나섰다. 코스는 무인도인 사등면 취도에서부터 연초면과 수월동에 걸친 다나까농장, 6.25 전쟁포로 역사지인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계룡산 정상의 통신대 등이다. 

사등면 가조도 앞 취도에 세워져 있는 러일전쟁 승전기녑탑.
사등면 가조도 앞 취도에 세워져 있는 러일전쟁 승전기녑탑.

# 일제의 망령 거제 취도기념탑

성포에서 가조연육교를 지나 남북으로 호리병모양 길쭉한 섬 가조도에 들어섰다. 북쪽 해안선을 따라가다 신교마을을 지나 북쪽 해변 멀리 작은 봉우리 두 개가 연이은 섬이 취도다. 취도는 여객선이 없는 무인도로 배를 따로 불러야 갈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해군 함포사격장으로 사용된 취도는 지금은 그 형태가 10분의1만 남아 지형 자체가 바뀌었다.

육지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 섬 봉우리 중앙에 일본 해군이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취도기념탑이 있다. 1935년 8월23일 일본 진해해군 요항사령부가 세운 이 기념탑은 높이 4m·둘레 2m 크기다. 

탑 꼭대기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녹슨 12인치 함포탄(미카사 등의 전드레드노트 전함들의 주포탄)의 모형이 포탄이 하늘로 향해 거꾸로 꽂혀 있다. 탑의 정면에는 '취도기념(吹島記念), 해군 중장 고바야시 세이자부로(小林省三郞)'란 글씨와 뒷면에는 건립경위가 적혀 있다. 탑 건립에는 220원73전이라는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거금이 들어갔으며 393명의 인부가 동원됐다. 가조도 어민들은 이 탑 때문에 취도를 '총알섬'이라고도 부른다. 

탑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미화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참전했던 일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을 국가 영웅으로 부각시켜 놨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 장병과 친일 협력자들이 승리를 염원한 행사를 이곳 해상에서 열기도 했다. 

한때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철거와 보존 논란이 일었다. 일부 시민들은 취도 기념비가 일본에 대한 관광·상품적 가치가 있다며 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관광지 개발은 우리민족 정기를 훼손하는 일로 반대를 내세우기도 했다. 또 과거의 불행한 역사도 후대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일제강점기 잔재들을 모조리 철거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2005년 거제YMCA 등 시민단체들은 취도를 방문해 탑을 돌로 둘러싸버리는 '평화의 돌탑'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당시 일부 언론사들은 광복60주년을 맞아 건립 70년만에 시민단체에 의해 이 탑이 철거된다고 보도했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지 100주년이 되는 2008년 YMCA와 마산의 열린사회 희망연대 회원 40여명은 전승기념비를 평화의 탑으로 에워싸는 돌탑 쌓기 행사를 진행했다. 이들은 취도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과 왜의 수군들이 격전을 벌인 주요 해전지역의 중앙에 위치하는데도 일제가 승리기념탑을 이곳에 세웠던 이유로 '한반도 남해의 혈도를 끊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자 함'이 분명하다고 외쳤다. 

취도 기념탑에 새겨진 취도회고에 '한 주먹에 취도는 옛 형태를 찾기 어렵고 바위는 포탄에 모래알 같이 부서졌다. 이 기쁘고 또 기쁜 일이 황국의 이름으로 천년이 가도 없어지지 않는 도다'라는 구절은 군국주의의 부활을 획책하는 일본 우익들에게는 영광의 역사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국권상실이라는 불행한 역사적 사건 기록이다. 

일본이 위안부 사과나 평화헌법 폐기를 주장하며 우경화 돼가고 침략의 과거사를 반성할 줄 모른 채 군사대국화로 이어져 군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일제의 망령 취도기념탑을 과거의 불행한 역사라고해서 무조건 철거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말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교훈으로 삼을 수 있도록 보존·관리와 이제는 포로수용소와 같은 아픔을 기억하는 장소로 탈바꿈이 필요한 시기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연초면 임전마을과 수양동 일대에 다나까농장이라 불렸던 들녘.

# 조선인 노동자 피땀으로 일군 다나까농장

일제의 망령 취도를 뒤로하고 국도14호선을 미끄러져 고현동 시가지를 지나 수월리 해명마을과 연초면 연사리 임전마을(일명 깨밭골) 앞에 펼쳐진 14만여평 '다나까농장'을 찾았다. 저수지 1개소와 주로 논농사를 짓던 농장이었던 들판엔 농경지는 적어지고 한쪽으로 신축 아파트와 도로가 번듯하게 들어섰고 바닷가 뚝방길은 주민들의 산책로로 유명해졌다. 

다나까농장은 경술국치 이후 다나까 후데요시가 1924년 봄부터 10여년간 조선인 노동자들을 동원해 하루 잡곡 한됫박여를 주고 황량한 갯벌에 둑을 쌓고 간척공사를 시작해 만들었다. 1918년 야마구찌가 이곳에 간척사업을 진행하다 실패한 것을 매일 조선인 노동자 200여명을 새벽부터 늦은밤까지 남자는 잡곡 한되, 여자는 반되여의 품삯을 주고 갯벌을 농토로 일궜다.

그 당시는 모두가 배를 곯던 시절로 조선인 노동자들은 밥이 생기는 일이면 목숨을 걸다시피 해 늦은 밤 집을 나서 새벽녘에 공사현장에 투입됐다. 지친 몸으로 투입된 사람들은 가혹한 노동으로 작업도중 쓰러져 죽어갔다. 이들 조선인 노동자의 피땀이 14만여평의 다나까농장에 묻혀있다.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이후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인 쌀 약탈에 들어갔다. 그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농업 생산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쌀 폭등'이 일어나는 등 어수선한 정국이었다. 1924년 1월 조선총독부 후지모리국장은 다나까 후데요시를 긴급 호출해 섬인 지형적인 특성상 토지 확보가 안 돼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던 거제도에 간척사업을 맡아 농토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다나까는 먼저 바닷물 유입을 막을 제방을 쌓기 위해 김봉수(작고) 소유의 개수끝산(현 중앙고)을 사들여 필요한 돌과 흙을 확보해 바다 가운데 제방을 쌓고 갯벌을 농토로 바꾸어 나갔다. 90여년의 지난 지금 조선총독부의 후광을 업고 거제도의 쌀을 약탈해 가는 대리인에 불과했던 다나까였는데도 아직도 이곳을 아는 사람들은 '다나까농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땅의 탄생 배경을 들여다보면 주연은 분명 암울한 일제 강점기 피땀으로 제방을 쌓던 우리들의 할아버지·할머니다. 이제는 10여년간 피땀으로 바다를 농토로 일궈낸 그분들의 아픔의 역사를 기억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거제포로수용소 막사 입구.
거제포로수용소 막사 입구.

# 6.25전쟁과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6.25 전쟁포로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았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중공군 포로들을 주제로 만든 유적공원은 고현시내에서 10여분이면 닿을 수 있고 거제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들려야 하는 곳으로 꼽는다. 전시관 내부는 6.25 당시 생활과 다양한 체험거리가 있어 보고 즐기기에 충분하다. 

6.25전쟁 발발 후 유엔군사령부는 공산포로들을 수용할 목적으로 고현동·수월동·장평동·연초면·송정리 일대 땅·동산·가옥 등을 강제수용 해 고현동과 수양동 중심 일대로 1951년 2월∼1953년 7월까지 포로수용소를 건립해 전쟁 당시 사로잡은 조선인민군·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했다. 거제도는 육지와 가까워 포로를 수송하기 수월하고 육지와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어서 포로들을 격리 수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1951년 10월말까지 인민군 포로 15만명· 중국인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3천명의 포로가 있었다.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 있고 당시 포로들의 생활막사·사진·의복 등의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들이 전시돼 있다. 잔존 건물 일부는 거제고현중학교 안에도 있으며 1983년 12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전시물 가운데 포로들의 살상이 가장 심각했던 '거제도포로 폭동사건'을 되짚어봤다. 

이곳에 수용된 13만2000명의 포로들은 1949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국제연합군측이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주장하면서 반공(反共)·공산포로로 나눠 대립했다. 

제76 포로수용소 공산포로들은 1952년 5월7일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1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해 수용소장인 F.T 돗드 준장을 납치한다.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자유의사에 의한 송환방침 철회·심사중지·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했다. 국제연합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 사건을 막기 위해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H. L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새로 임명했다. 

유적공원 매표는 입장·체험·주차가 각각 분리·운영하며 사용료도 따로따로 내야 한다. 먼저 입장과 체험을 선택해 요금을 지불하고 여러가지 시설물 사용료는 현장에서 지불하면 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생생한 역사 현장을 다양한 조형물로 재현한 곳을 둘러봤다. 지난해 3월1일 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에서 이곳에 전시된 김백일 동상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워 놓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김백일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세운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를 졸업하고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돼 중대장까지 한 인물로 항일무장세력과 무고한 민중에 대한 탄압에 앞장서는 등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던 인물이다. 이것을 인정받아 공로 포상까지 받았던 인물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해당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결정됐다. 동상 철거와 보존에 대해 아직도 시민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이곳을 지나 1950년 12월24일 흥남부두에서 민간인 10만명을 성공적으로 탈출시켜 거제도로 후송한 '흥남 철수작전'을 기념해 세운 비석을 둘러봤다. 흥남철수작전은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인도주의적인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표소에서 공원 안으로 가는 길에는 6.25 참전 16개 국가와 UN 기가 게양된 분수광장이 나온다. 전쟁-포로-복원-평화존의 순서로 동선을 따라 전시물들을 구경·체험했다. 매표소 옆 소련제 T-34 탱크 모형은 입구부터 촬영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동강철교를 지나 국내 최초 롤러코스터형 짚라인 아바타포 체험장 유료체험장에 들어섰다. 30㎏ 미만·85㎏ 초과자·음주자는 탑승이 안되며 일반 1만5000원, 초등 1만3000원의 요금을 따로 지불해야 한다.  

유적공원에서 계룡산 정상까지 관광모노레일을 탈수 있는데 대기줄이 길다. 왕복요금은 일반 1만4000원, 중·고생 6000원, 24개월∼초등생·경로 4500원, 장애인·유공자 3500원이다. 거제시민은 주민등록 확인 후 할인해 준다. 운행은 3월에서 10월까지는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11월에서 2월까지는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까지다. 탑승권은 매표소에서 끊는 것보다는 인터넷으로 예매하면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거제시는 지난 6일 한국전쟁 때 유엔군 사령부가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건설하면서 강제 징발한 토지·건물 등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면(面) 단위 행정문서 '난민정착 관계 서류철(難民定着 關係 書類綴)'을 발견했다. 1957년 연초면에서 만들어진 이 서류에는 포로수용소를 만들면서 토지·건물 등을 강제수용 당한 지역 주민피해를 보상해달라고 요청한 서류와 흥남 등에서 피난온 북한주민, 토지·건물을 징발당한 지역민들이 머물 주택 건축사업 과정이 적혀있다.

징발확인서를 보면 유엔군사령부는 1951년 5월25일 연초면 연사리 전답 9만9568평·건물 122동, 송정리 전담 6874평을 강제수용했다. 징발 토지일람표에는 87명의 소유자·소재지·지번·지목·지적 등이, 징발건물 일람표에는 47명의 소재지 지번·가옥 수·건평·구조·대지평수·소유자 등이 적혀 있다. 

또 현재 송정덕산맨션 앞 도로와 공터 위치인 연초면 송정리 177∼204번지 논이 징발된 후 포로묘지로 이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강제징발된 건축물과 토지는 수용소가 폐지된 1954년 11월22일 원주민들에게 반환됐다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거제시는 2017년 10월17일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국내는 물론 미국과 유럽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에서 포로수용소와 관련된 기록물과 영상 등을 수집·발굴해 2018년 3월 유네스코에 등재를 신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네스코는 한일관계 악화와 위안부 문제 등 국제정세에 휘말리면서 내부규정 변경을 빌미로 등재신청을 받지 않고 일정을 미루고 있다. 

거제시민들의 염원과 노력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포로수용소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것이다. 이로써 포소수용소유적공원은 거제시의 위상 제고는 물론 역사의 산교육장으로써 관광자원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희망을 걸어본다. 

계룡산 정상 인근에 남아있는 포로수용소 통신대 잔존 유적지들.
계룡산 정상 인근에 남아있는 포로수용소 통신대 잔존 유적지들.

# 계룡산 정상 부근 방치된 통신대

포로수용소 바로 뒷편 계룡산(해발 566m) 정상 밑에는 6.25전쟁 당시 무선 기지국이라고 할 수 있는 통신대 잔해가 남아있다. 

포장과 비포장을 거듭한 임도를 따라 차로 올라가 30여분 산을 타고 오르거나 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계룡산 정상 종점까지 가면 볼 수 있다. 

6.25 한국전쟁 후 옛 신현읍 일대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군사 작전용 통신소가 설치되었는데 처음에는 독봉산 정상에 소규모 통신 중계소가 있었다. 이후 상동 뒷산 능선을 따라 도로를 만들어 계룡산 범바위 앞쪽에 통신대를 만들었다. 거제도와 전국은 물론 멀리 일본까지 군사적 문제에 대한 통신을 중계했다고 한다. 더이상 비바람에 시달리며 방치할 것이 아니라 관리·보존의 손길과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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