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부 거제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김의부 거제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거제도에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해 살아왔다는 역사를 거제면의 후등패총에서 확인을 할 수가 있다. 삼한시대 유물로는 거제남산패총·일운내도패총 등이 대표적이며 청동기시대의 유물도 20개소 발굴됐다.

독로국인 거제는 장목고분의 출토품을 보고 가야문화권에 속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가야는 562년(신라진흥왕23년) 신라에 편입돼 거제도는 신라에 속하게 됐다.

신라는 677년 상군(거제둔덕거림치소 추정)을 설치하고 757년 거제군으로 개칭해 오늘까지 부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14년) 산남도의 진주 절도사 관할의 영현으로 거제현으로 삼고 별호로 기성현이라 했다. 1128년(인종6년) 거제는 변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도적들이 들끓거나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됐다. 명진현·송변현·아주현의 해적 좌성 등 820명이 투항해 왔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1112년(예종7년) 승통(僧統) 정의 거제유배를 시작으로 유배지가 됐다. 1170년(의종왕24년) 정중부의 숭문주 경인란으로 거제도로 유배됐으며 고려 말기에는 왕족들이 대거 거제도로 유배됐다. 1271년(원종12년) 거제도는 왜구의 침범과 삼별초군(1270~1271년)의 내도로 인해 거창현 영속인 가조현(거제현민·아주현민·송변현민)과 고성현의 영현인 영선현(명진현민)으로 전도민이 피난을 갔다.

조선시대 1422년(세종4년) 거제도민들을 모두 피난지에서 돌아오게 하고 지현사를 파견해 수월평에 목책을 치고 거제현 시대가 시작됐다. 거제현의 치소지는 수월(1422년)→사등(1425년)→고현(1451년)→거제(1664년)로 옮겼다. 거제는 국방의 요충지로 1489년(성종20년) 7진(옥포진·조라진·지세포진·영등진·장목진·율포보·가배량진)을 두게 됐고, 이후 1500년(연산6년) 오양보를 설치해 8진을 두게 됐다.

국방의 요충지로 거제에는 상군치소성 1개소(거제둔덕기성 추정), 거제현성이 3개소(수월성·사등성·고현성), 속현의 현성이 3개소(아주성·옥산성·다대산성 추정), 관방성으로 7개소(옥포성·지세포성·구조라성·구영등성·구율포성·오량성·가배량성), 기타 6개소(당등성·하청성·성포산성·중금산성·율포산성·탑포산성), 그외 일본성으로 4개소(구영왜성·송진포왜성·장문포왜성·광리왜성)로 현재 거제문화유적분포지도에 24개성이 기록돼 있다. 그래서 거제시는 '성곽의 보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거제는 문헌 기록으로 전하는 역사기록이 적어 유물로 시대를 가름하고 있는 실정인데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더 발굴·보호하는 정책을 써야 함에도 비지정 문화재라는 이유로 허가를 남발해 귀중한 문화유산인 성곽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례로 고현성은 한국전쟁으로 2/3가 사라졌다. 당등성은 옥포해전의 산 증언을 할 수 있는 성인데 1973년 국가산업단지 옥포조선소 부지에 편입돼 사라졌고, 수월성은 조선시대 최초의 거제현성으로 보존의 가치가 있었으나 2014년 전원주택지로 사라졌다. 광리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1593년(추정) 일본이 축성한 유일한 토성으로 거제의 토성연구와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자산인데 2018년 펜션공사의 허가로 많은 부분이 사라진 게 현실이다. 하청성은 2009년 한옥마을 조성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지고, 성포성은 기능상 망을 볼 수 있고 부산과 통영을 연결하는 수로로 해전 상에 매우 중요한 위치의 성인데도 도로공사로 거의 형태가 사라진 상태다. 거제시가 말하는 '성곽의 보고'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싶다. 최근 개인이 조성한 조그마한 매미성도 관광자원화 됐으며, 축산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미발굴한 가라산 축산성도 연구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곽 문화유산은 거제역사의 산 증거로 후손들에게 잘 보존해 물러줄 의무가 거제시민 모두에게 있다. 이는 지역역사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거제시는 비지정 문화재도  보존할 방법을 찾아 보존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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