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를 만들게 했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탄생 축하선물로 상자를 하나 주면서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판도라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게 된다. 그러자 그 상자 안에 있던 온갖 욕심·질투·시기·질병 등이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판도라는 깜짝 놀라 상자를 닫았다. 그러나 상자의 맨 밑바닥에 있던 '희망'이 미쳐 빠져나오기 전이었다.

희망(希望)이라는 한자의 희(希)는 주역(周易)에서 점괘를 가리키는 효(爻)와 수건 건(布)이 합쳐진 글자다. 앞으로의 운수를 알려줄 점괘를 수건이 가리고 있는 형국이다. 미래는 수건으로 가려져 알 수 없기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판도라의 상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인생인지 모른다.

전에는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신화가 감동적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구두닦이, 신문배달로 학비를 벌고, 불쌍한 동생들까지 먹여 살리면서도 꿈을 잃지 않고 주경야독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공부하는 학생시절 책상 앞에 써 붙이는 글이 '노력'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만하면 되는 줄 알았다. 정말 그런가?

열심히 일하면서 아끼고 저축해 월셋집에서 전셋집으로 전셋집에서 자기 집을 장만하는 희망이 있는 사회, 가난해 아빠·엄마 찬스가 없어도 열심히 공부하면 판·검사도 되고 의사도 될 수 있는 사회,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 곧 '계층희망사다리'가 사회 역동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배경으로 결정되는 사회라면 그건 병든 사회이다. 마치 '기울어진 경기장'에서는 결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