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락객들이 절 옆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법당 처마밑에 모였다. 춘성스님은 마당에 천막을 치고 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비오는 데 여기서 고기도 구워 먹으면서 놀거라' 그 말을 들은 승려들과 보살들이 당황해하자 춘성스님은 '이것저것 다 따지면 절에 누가 오겠느냐'라고 했다.

겨울에 떨고 있는 거지를 만나면 입은 옷을 벗어주고 팬티바람으로 절에까지 걸어오시는 스님, 이불은 이불(離佛)과 음이 같다며 이불을 덮지 않고 주무신 스님, 만해의 '조선독립의 서'를 임시정부에 전달한 스님,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스님이지만 화엄경을 거꾸로 외울 만큼 치열하게 공부하신 스님, 스승이 감옥에 가자 그 뒷바라지를 하며 땔감이 있어도 한겨울에 불을 때지 않은 냉방에 주무신 스님, 다비식 때 후학들이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움'을 합창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가 춘성스님이시다.

독립운동가요, 문인이요, 선승이셨던 춘성은 1891년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출신이다. 백담사 만해 한용운 휘하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평생을 만해의 유일한 제자가 됐다.

만해스님이 감옥에 계실 때 상좌 춘성은 스승을 위해 옷 한벌 지어 보냈다가 절 살림을 사사로운데 썼다고 꾸중을 들었다. 1922년 고문 당하는 스승을 살려내려고 절에 소속된 토지를 팔아 보석금으로 내고 석방하게끔 했다. 이를 안 만해는 "절 재산은 중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재산이 아니다. 공사도 구분 못하는 네놈은 이제부터 내 제자가 아니다"며 쫓겨나기도 했다. 그 이후 춘성스님은 평생을 절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남겨진 것은 지팡이 하나, 옷 한 벌, 바리때 하나, 틀니 뿐이었다. 진정으로 무소유를 실천하시다 가신 스님이시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모금된 지원금을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한 것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요즘 춘성스님의 일화가 새롭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