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출근길, 안개 낀 대교에서 자동차 추돌사고가 났다. 첫 번째 속도는 미리 멈춰서 멀쩡한데 뒤따르던 속도는 심한 엄살을 부리고 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촘촘한 걸음을 재고 있는 사이, 여유 부리던 이웃의 속도들이 구경꾼이 돼 웅성거리고 있다. 순식간에 모여든 속도들이 서로 모른 체한다. 그러는 사이 멀쩡한 속도를 뒤따르던 세 번째 속도가 관성의 법칙을 들먹이며 애걸복걸이다. 최선을 다해 힘을 줘 멈추려고 애써 보지만 이미 속도는 딴청이다.

이제, 잠시 쪼그라져 죽은 속도들을 다시 살리려 엄청난 속력이 굉음을 내며 달려올 것이다. 모든 아픔은 멈추고서야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려 엄청난 속력으로 달려올 것이다.

출근길에 마주한 자동차 사고의 장면이 우리 삶과 너무 닮았다. 당신은 절대적으로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결코 당신의 온전한 마음이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상통하리라는 착각 속에 서로 다른 속력으로 아슬아슬 살아간다. 그래서 전혀 갈등을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마음과 마음들이 부딪혀 서로 다른 속력들이 아픔을 만들고 있다.

'나'라는 무게에서 빠져나와 '세상'을 공정히 바라보며 갈등을 치유하는 어른이나 정치인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이거나 정치인은 다음의 질문에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개인이나 단체의 정의는 무엇에서 비롯하며 누가 판단하는가.

'주의·주장'이나 '선언'의 기초는 무엇이며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없앤 순수한 공정성을 가지는가. 정당과 계급의 싸움들이 과연 보편타당한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그 정의 아래 희생돼 사라지는 '약함'들은 없는가? 기존 세력의 존립을 위해 희생되는 '먹이'는 없는가, 그 먹이를 즐거이, 그래서 당연히 여기지는 않았는가, 어른과 정치인은?

다시 고민해보자, 다툼과 속도·경쟁 사다리를 힘겹게 건너 온 사람들이 청년에게 그 사다리의 부조리에 대해 미리 알려주거나 건너지 말 것을 용기 있게 말하는 어른이 있는가. 솔직히 자식이나 청년에게 인격적으로 대하는 게 손해 보는 기분이거나 나약해진 기분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경험은 없는가. 당신이 세상을 험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요즘 아이들의 마음과 행동들이 곱지 않다고 탓한 적은 없는가.

희망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정치인은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낮춰 본 적이 있는가. 혼란의 정치 안에 미래세대를 끌어 들일 줄만 알았지, 오히려 세상의 시스템과 오류를 걱정하는 청년을 책망하는 정치인은 없었는가.

답한다면, 어른이나 정치인의 깨끗한 용기와 바른 의지에 기대어 삶의 희망을 기대하는 순수한 눈망울들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정치인은 필요 없다. 희망은 언제나 정치인에게서 나왔다가 그릇된 정치인에 의해 사라지기도 한다. 무릇 우리가 훌륭한 정치인을 기억하는 것은 주어진 권력을 겸허히 받들며 권력 이전에 따뜻한 감성과 약한 자를 위해 강한 자를 다그치는 모습이다. 

엄청난 벽의 기득권에 부딪혀 멈춰 선 청년들의 희망들과 코로나로 힘들어진 서민들이 일그러진 속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진다.

예측하지 못한 너무 빠른 속도를 다스리지 못한 결과다. 마음과 마음 사이 얼마든지 속도와 예의를 갖출 시간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미 늦은 아픔들이 밀려온다. 가까이 마음을 얻겠다고 얼떨결에 부딪혀 상처 입은 마음이 더 아프겠다 싶을 때 지금의 아픔을 치료해 줄 더 엄청난 어른이 달려왔으면, 지금의 설움을 달래 줄 더 엄청난 정치인이 달려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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