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에서 광명으로, 베토벤 음악의 힘
암흑에서 광명으로, 베토벤 음악의 힘
  •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 전 '객석' 편집장
  • 승인 2020.0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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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전 '객석' 편집장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전 '객석' 편집장

바다가 보이는 공연장은 특별하다. 공연이 시작되면 청중들은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쉬는 시간에 공연장에서 보는 바다는 꿈의 연장이다. 땅만 쳐다보며 열심히 달려온 일상에 하늘과 바다의 푸른빛은 격려와 힐링의 성분을 담고 있다. 공연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일상은 전과 같지 않다. 공연예술의 효용은 가시적이지 않다. 하지만 공연예술은 이따금 수용자의 내면에서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한 번에 이뤄내기도 한다.  

바다가 보이는 거제문화예술회관이 기지개를 켰다. 70주년을 맞은 6.25 이틀 뒤인 지난달 27일,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한 베토벤의 프로그램이 거제를 깨웠다.

첫곡은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오페라를 위해 작곡한 네 곡의 서곡 중 레오노레 3번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예술감독 오충근의 씩씩한 지휘 동작에 맞춰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약간 빠른 템포로 경쾌한 느낌과 함께 베토벤 특유의 심각하고 진지함이 객석까지 전달됐다. 그러면서도 목관악기는 서정적으로 노래했고 일사불란한 합주로 끝을 맺었다.

한국인 최초 비에냐프스키 콩쿠르 최연소(15세) 2위 입상에 빛나는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흰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무대 위에서 조율에 오랜 시간을 들이며 신중을 기했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의 긴 전주가 끝나고 제작된지 360년도 더 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찬란한 음색을 뿜었다. 어둠 속을 조용히 비추는 빛처럼 연주가 시작됐다. 신중하고 진지함을 견지하다 갑자기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듯한 순간들이 이어졌다. 1악장 카덴차 직전에 턱에 대는 수건을 줍다가 조금 늦게 카덴차에 들어가는 해프닝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악장 들어가기 전 조율하던 중 높은 습도에 나무가 붙어 조이개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자칫 어색한 시간이 흐를 수 있었는데 이례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 출신 지휘자 오충근이 솔로이스트를 도와주는 훈훈한 장면을 청중이 함께 지켜봤다. 협주곡은 경쟁과 협력 속에서 익숙한 것과 낯선 것, 긴장과 이완이 교차하는 예술이란 사실을 상기시켰다.    

2악장에서 한수진이 내는 윤택한 고음을 오충근과 부산심포니가 낭만적으로 반주했다. 가만히 듣고 있어도 숭고함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끊이지 않는 바이올린 고음현이 황홀한 노래를 불렀다. 트릴은 눈부시게 반사되는 빛 같았다. 3악장에서 바이올린은 적극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비올라를 연상시키는 저음과 귀를 간질이는 고음 사이를 오가던 한수진의 바이올린은 1악장의 해프닝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3악장 카덴차를 자신감 있게 펼쳤다. 음악은 단지 멀리서 나부끼는 존재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듣는 청중의 가슴을 흔들 수 있다. 객석으로 퍼지는 귀한 떨림이 값지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메인 프로그램인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은 모두가 익숙한 곡이지만 연주자 입장에서는 해석하기가 까다롭기로 손꼽히는 곡이다. 숨을 곳이 없다. 외나무다리 위의 정면승부다. 제자 쉰틀러에게 베토벤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했던 1악장은 절제가 느껴지는 묵직한 총주로 시작했다. 호른이 큰 음량을 내줬고 오보에는 기나긴 탄식을 뱉었다. 진지하고 육중하게 해석한 쾌연이었다.

2악장은 첼로를 비롯해 둥글게 퍼지는 온화한 사운드가 감미로웠다.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넓고도 넓은 음향풍경을 만들어냈다. 3악장에서 각 악기군들의 돌림노래는 눈이 부셨다.

4악장은 밝고 확신에 차 있었다. 절제의 빗장을 풀고 가장 자신 있는 강주를 냈다. 언덕에서 바위가 굴러가듯 환희를 향해 점점 빨라지는 템포가 미소를 자아냈다. 총력을 다한 승리로 곡을 마무리지었다. 연주 전 해설을 맡은 음악평론가 조희창은 파울 베커를 인용하며 베토벤 교향곡 5번의 각 악장이 투쟁-희망-의심-승리를 의미한다고 했다. 설명 후 연주를 직접 들어보니 그 의미가 손에 잡힐 듯했다. 

앙코르 첫 곡은 브람스 헝가리 무곡 1번이었다. 연주하고픈 집시의 열정이 잘 드러났다. 깜짝선물 같은 두 번째 앙코르는 이동준이 작곡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제가였다. 포로수용소가 70년 전 비극을 증언하고 있는 거제에서 생생한 연주로 들으니 눈앞에 영화의 장면이 그려지며 가슴이 뭉클했다. 바다가 보이는 공연장을 떠나는 청중에게 평생 암흑에서 광명으로의 삶을 지향했던 베토벤의 음악이 말해주고 있었다. 6.25의 비극을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이뤘듯이 코로나의 상처도 극복할 수 있다고.

지난달 27일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한 베토벤의 프로그램이 거제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지난달 27일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한 베토벤의 프로그램이 거제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지난달 27일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한 베토벤의 프로그램이 거제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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