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현장 찾아가는 거제 다크투어리즘④]제주, 아픈 역사도 관광자원으로 승화 ①
국제적 관광도시 '제주'…다크투어로 치유에 나서다①
강제동원과 학살로 이어진 제주...민초의 피와 눈물이 스며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 지역에 있는 '알뜨르비행장'. 지금도 격납고 19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 지역에 있는 '알뜨르비행장'. 지금도 격납고 19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다크투어리즘은 아프고 무거운 주제다. 특히 제주 4.3과 일제강점기 등 근현대사를 집중 조명한 제주 다크투어리즘은 아픈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현재진행형이다.

환상의섬 또는 힐링의섬 제주로 불리지만, 과거 제주는 한과 통곡이 응어리진 땅으로 주민들의 피와 눈물과 처참하게 찢긴 살점이 스며있는 아픔의 땅이다. 이제는 그 내면을 보듬고 치유할 때이고, 제주도청도 수년전부터 다크투어리즘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제주 다크투어리즘은 크게 동부권과 서부권으로 나누며, 주제는 제주 4.3유적과 일제강점기 군사유적 등으로 대표된다. 동부권은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과 4.3 평화공원을 중심으로 한 제주 4.3 다크투어리즘, 서부권은 알뜨르비행장과 일제 동굴진지와 섯알오름 등을 중심으로 한 일제강점기 및 4.3 다크투어리즘으로 나눴다.  

편의상 권역과 주제를 분리했지만 제주 전역이 어둡고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일제강점기 전쟁의 참혹함이 있었던 곳곳이 또 4.3 학살의 현장이었고, 4.3의 참혹한 현장이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흔이나 다름없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제주공항 역시 다크투어의 대상지일 정도로 제주는 다크투어리즘의 대표적 도시다. 제주도는 이러한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다크투어리즘을 개발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반면 개발과 발굴·보존이라는 현실적 딜레마에 빠져 갈등을 빚기도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서귀포신문 장태욱 편집국장은 "4.3 학살터가 백사장이나 야외무대 등으로 변하고 인근에는 리조트나 각종 전시관 등 현대시설이 들어서고 있다"며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기념비 하나 없이 흔적조차 사라져가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개발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아픔의 현장이 난개발의 상징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하지만 산재한 문화유적들을 발굴·보존하면서 천혜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스토리텔링이 가미되면 제주는 세계적인 다크투어리즘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게다가 제주는 섬 전체가 해안절경이고, 다소 이국적인 정취까지 풍겨 다크투어리즘으로 손색없다. 중간중간 쉴 수 있는 공원과 카페에다 맛집까지 산재해 관광도시로서 제격이다. 

제주도는 몇년 전 격납고에 비행기를 전시해 놓고 방명록도 옆에 뒀다.
제주도는 몇년 전 격납고에 비행기를 전시해 놓고 방명록도 옆에 뒀다.

공항부터 제주 전역…다크투어 대상지

제주의 다크투어는 공항에서부터 시작된다. 과거 정뜨르비행장으로 불렸던 제주공항은 4.3 때 학살과 암매장이 이뤄진 비극의 현장이다. 발굴작업을 통해 활주로 옆에서 388기의 유해와 2000여점의 유품이 수습됐으나 아직도 공항 주위엔 수백명의 희생자들이 더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뜨르비행장이 4.3학살의 현장이었다면 서부권에 모슬포항을 끼고 있는 알뜨르비행장 일대는 일제강점기 침략의 역사와 4.3 학살의 참혹함이 동시에 묻어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알뜨르는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 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근대문화유산 제39호인 알뜨르비행장은 토속적인 이름과 달리 모슬포 주민들의 눈물이 담긴 비행장이다.

중국 침략을 계획하던 일본이 1926년부터 약 10년간 제주도민들을 강제징용해 건설한 곳이기 때문이다. 제주국제공항으로 쓰이는 정뜨르 비행장과 함께 대표적인 일제의 군사시설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비행장을 20만평에서 80만평으로 확장해 전쟁 전초기지로 삼았다. 목숨을 위협받으며 고된 노동에 시달렸을 주민들의 고통이 생생히 남아 있는 현장이다. 비행장 벌판에는 격납고 19개와 활주로·벙커·땅굴 등이 남아 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모슬포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해 활주로를 비롯한 비행기 격납고와 탄약고 등을 10년에 걸쳐 세웠는데, 후에 다시 한 번 더 확장했다.

제주4.3평화기념관 모습.
제주4.3평화기념관 모습.

전쟁 광기 대변하는 알뜨르비행장

중일전쟁을 벌였던 일본은 알뜨르를 전쟁의 전초기지로 삼았고, 일본에서 이곳으로 날아온 비행기가 주유를 하면 상하이·베이징·난징까지 공습이 가능했다고 한다. 전선을 남쪽으로 확대해나가던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미국과의 전쟁을 위해 남부 해안을 군사기지화하면서 원래 66㏊였던 알뜨르비행장을 264㏊의 규모로 확장했다.

패색이 짙어진 일본이 극단적으로 내세운 전술인 가미카제를 위한 조종 훈련을 이곳에서 했다고 하니 섬뜩하면서도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격납고는 폭격에 견디기 위해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지금도 웬만한 중장비로는 끄떡도 않는다고 한다.

무·감자밭 군데군데 흉물스럽게 놓여 있는 격납고는 지금도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인근에 광범위하게 널려 있는 포진지와 땅굴, 송악산 해안진지 등 남아 있는 일제의 군사유적이 전쟁의 광기를 대변한다.

한켠에 설치된 조형물 '파랑새'는 전쟁과 슬픔을 넘어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다. 동학 농민군들이 사용하던 죽창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졌다.

현재 비행장 인근은 대부분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다. 농작물 너머로 보이는 격납고와 구조물에는 고난의 역사가 아직도 생생하지만 이제는 생명을 키우는 땅이 돼 희망을 전하고 있다.

비행장 옆 섯알오름은 제주 4.3학살이 자행됐던 곳이다. 곳곳에는 일제 군사유적과 4.3 학살의 참혹함이 묻혀 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 만들어져 있는 파랑새 조형물.
제주4.3평화기념관에 만들어져 있는 파랑새 조형물.

일제가 남긴 지하 탄약고, 양민 학살터로 사용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폭탄창고 터이다. 당시 일본군은 야트막한 섯알오름의 내부를 파내 폭탄창고 터로 사용했으며, 폭탄창고 터가 있는 오름의 정상부에는 두 개의 고각포진지를 구축했다.

이 폭탄창고 터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이 구덩이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학살이 시간 간격을 두며 두 차례에 자행됐기 때문에 암매장 구덩이도 두 개가 만들어졌다.

죽음을 안 희생자들은 군용트럭 위에서 고무신을 벗어 던지며 유해라도 거둬 달라고 흔적을 남겼고, 후손들은 위령비 앞에 현재 고무신을 남기며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야만 했던 원한 많은 영혼들을 추모한다.

학살터의 보존을 위해 2002년 백조일손유족회 중심으로 '학살터 매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매입을 추진했고, 2005년 제주 4.3연구소의 '4.3 유적 종합정비 및 유해발굴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제주도 주관으로 학살터 정비사업이 이뤄졌다.

안내판에는 "'한 사람이 한 명씩 총살하라'는 중대장의 명령에 대원들이 일렬종대로 대기하고 있다가 트럭에서 내리는 민간인을 이곳 호 가장자리로 끌고와서 한 명씩 세워놓고 지휘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해 시신을 호 안으로 떨어지게 한 장소"라고 쓰여 있다. 

알뜨르비행장과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이어지는 송악산까지는 일제 군사유적이 곳곳에 산재한다. 강제로 동원돼 땅굴을 파야했던 주민들의 아픔이 묻어나고 콘크리트로 구축한 고사포진지가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잔영으로 남아 있다.

또 예비검속으로 집단학살과 암매장됐던 섯알오름에서 살벌했던 당시 상황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는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의 자살 특공부대의 시설로서 해안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미군 상륙정에 잠수정·작은 목조보트 등을 이용, 폭탄을 싣고 자살공격을 감행하기 위한 일본 해군의 특공기지다.

천연 해식동굴 2곳을 포함해 총 17개 동굴이 일본군 군사시설로 이용됐고, 주민들도 굴착작업에 동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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