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다크투어, 절규의 서대문형무소·남산 국치길 아픔 기억
서울다크투어, 절규의 서대문형무소·남산 국치길 아픔 기억
  • 백승태기자,김은아기자,이남숙기자
  • 승인 2020.0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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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현장 찾아가는 거제 다크투어리즘 ③]피맺힌 외침 서대문형무소, 역사교육 장으로
수도 서울, 도시 전체가 역사 현장 빌딩숲 사이로 아픔 고스란히 간직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은 고대에서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제 식민치하였던 101년 전만 하더라도 나라 잃은 울분으로 가득했던 곳이지만 세월이 흘러 이젠 국제적 도시로 급부상했다.

하늘을 치솟은 빌딩숲 사이로 어두운 시대의 아픔과 절규의 상흔이 투영되는 서울은 도시 전체를 다크투어리즘 명소라 불러도 손색없는 역사의 고장이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에서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전갑생 연구원에 따르면 서울은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곳도 많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디든지 다크투어의 명소라고 부를 정도로 곳곳에 아픈 역사가 묻혀 있다.

그는 또 곳곳에 산재한 역사유적들을 복원한 곳도 더러 있지만 요즘 추세가 복원이 어려운 현실을 감한해 복원보다는 스토리텔링과 보존을 통한 역사교육과 다크투어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거제시도 역사박물관을 만들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을 발굴·보존·관리하며 하나로 묶어 다크투어리즘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역사현장을 복원하는 것에만 급급하지 말고 치욕의 역사라도 시대상황에 맞게 보존하고 알릴 수 있는 방안을 적절하고 조화롭게 스토리텔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장복원에만 급급한 다크투어보다 치욕의 역사라도 발굴·관리가 대세 

역사의 아픔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다크투어리즘은 어두웠던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후대가 되새겨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당시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희미해졌지만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불과 101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서울에는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고 나라를 잃은 울분이 가득했다. 서울에 남겨진 당시의 흔적들을 찾아 떠나는 '다크투어'는 서대문형무소와 남산 국치의 길을 택해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기억해 본다.

서대문형무소는 일본제국주의가 지은 근대식 감옥으로 일제의 탄압과 독립투사들의 참상과 울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제 강점기 아픈 역사의 상징이다. 1908년 10월에 문을 열어 1987년 11월 폐쇄될 때까지 80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됐다. 옥사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형태의 구조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갇혔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혔던 곳이다. 

1908년 경성감옥에서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여러 차례 변경됐다. 196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뒤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보안과 청사·제9~12옥사·공작사·한센병사·사형장 등을 남겨두고 나머지 시설은 모두 철거됐다. 

이후 서울시가 이곳을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적 제324호로 지정하고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만들었고, 서대문구에서 현장을 보존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1998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일제 탄압의 상징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독립공원으로 과거·현실 공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포함한 독립공원은 세월이 지나 이젠 시민들의 휴식공간이자 다크투어 명소로 부각했다.

공원에 들어서면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이 아픈 과거를 보여주며 현실을 되새기게 한다.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설계됐다는 독립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3.1독립선언 기념탑이, 왼편으로 서재필 동상이 서 있다. 또 독립관 건물도 보인다.

조금 더 위로 걸어가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만날 수 있다. 붉은색 긴 담장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건물이 보안과 청사였던 전시관이다.

전시관 1층은 형무소역사실·영상실로 구성, 형무소의 변화과정과 관련기록영상을 전시한 공간이다. 2층 민족저항실은 시기별로 셋으로 구분, 1전시관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1919년까지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 실상을 전시하고 있다. 2전시관은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카드를 전시하는 추모의 공간이다. 3전시관은 3.1독립만세운동 이후부터 1945년까지 독립운동과 사형장, 시신 수습실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지하에는 지하고문실과 그림자 영상체험 공간도 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정해진 작업, 정량의 식료품 배급, 교육과 운동에 대한 교정 규정을 뒀다. 그러나 실제로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는 형기가 확정되기 전부터 온갖 취조·고문을 자행했다. 옥사내에는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아 동상을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동사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름철에는 각종 전염병으로 병사자가 속출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처우가 가혹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정치·사회 문제와 관련한 간첩 및 사상범이 많이 투옥됐다. 특히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투옥돼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이해되기도 한다. 항일독립운동사의 수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체계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역사전시관·사형장·옥사 7개동·격벽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돼 고초를 당했던 현장으로 식민지 권력의 대중통제 시설로 이용됐다. 독립운동이 치열해 지면서 1920년대 초반 그 규모와 시설이 대규모로 확장됐다.

1918년 전후 지은 여옥사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현장으로,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8호 감방이 재현돼 있다. 1979년 철거됐다가 2009년 원설계도면이 발견돼 2011년 원형대로 복원됐다.

수감자 운동시설인 격벽장은 수감자들끼리 서로 대화를 방지하고 감시가 쉽게 부채꼴형태로 1920년대에 지었다. 해방이후 철거된 것을 2011년 원래 위치에서 20m 떨어진 곳에 복원했다.

사형장은 실제 사형을 집행했던 원형건물이다. 옆에 서 있는 나무가 통곡의 미루나무다. 사형장으로 가던 독립운동가들이 이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해서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일컫는다.

한 줄기 빛조차 허락되지 않던 지하독방은 취조 후 옥사로 이동하기 전 임시로 구금했던 곳으로, 취조과정에서 자행되는 고문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동지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도록 배치해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섬뜩했던 고문장면을 복원해 놓은 고문실에는 사람을 안에 넣고 흔들어 못에 찔리는 고통을 줬던 고문상자도 있어 당시 악랄했던 일제탄압을 여실히 보여준다. 상자고문은 영화 등에서 재현되면서 널리 알려진 일제의 만행이다.

현재 남아있는 5000여장의 독립운동가의 수형기록표를 모아 놓은 전시실은 옥고를 치르고 산화하신 선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으로 들어서면 숙연해진다. 

시체를 몰래 내다버리던 시구문까지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새겨야 할 아픈 과거를 뒤로 하고 다시 독립문 앞에 멈춰 선열들의 희생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일상의 여유와 고마움을 새삼 느낀다.

■국권상실의 역사…'남산 국치길'로 승화 낭만적 야경에 반해 치욕의 역사 간직

서대문형무소 외 최근 부각되는 서울 다크투어리즘은 남산 국치의 길이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밤에는 낭만적인 야경을 선사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남산 자락에 역사의 현장을 역사탐방길로 조성, 시민이 직접 걸으며 치욕의 순간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의미로 '국치의 길'이라 이름 붙였다. 1.7㎞에 달하는 이 길은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조선통감관저 터를 시작으로 조선총독부·노기신사·갑오역기념·경성신사 터와 한양공원비석·조선신궁 터로 이어진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밤에는 낭만적인 야경을 선사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강화도조약 이후 서울에 많은 일본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남산 아래의 충무로 일대에 모여 살면서 영역을 넓혀갔다.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남산 자락에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여러 시설이 들어섰다. '남산 국치의 길'은 그 흔적을 따라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조성됐다. 

국치의 길은 '한국통감관저 터'에서 시작된다. 1910년 8월22일 데라우치 통감과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곳에서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고, 8월29일에 조칙이 시행되면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슬픔을 겪게 된다. 현재 통감관저 터에는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기억의 터'가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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