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0주년 특집]흥남에서 거제까지…이장영 피난민이 회상하는 6.25와 거제도

최근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으로 평화의 길에 대한 멀고 험한 길을 실감하고 있는 가운데 6.25전쟁 70주년을 맞았다.

본지는 민족 비극의 동란70주년을 맞아 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으로 피난선에 의지해 목숨을 걸고 흥남에서 거제로 피난 온 피난민을 찾아 그가 회상하는 6.25전쟁과 거제도 피난살이 등을 들어봤다.

세월이 흘러 잊혀지거나, 또 개인적인 시각의 오류도 일부 있을 수 있지만 피난 당사자의 눈에 비친 당시 상황과 거제에서 겪은 피난생활을 생생히 전한다. 인터뷰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전하면서, 당사자들이 회상하는 '내가 본 6.25전쟁과 거제도' 이야기를 엮는다.    - 편집자주


이장영씨는 1940년생으로 함경남도 함흥시 낙민리(신창리)가 고향이다. 그가 11살 인민학교 4학년 때인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발발했다. 

■서울수복…그러나 전세 역전

연합군은 1950년 9월28일 서울을 수복하고 함흥에는 10월19일 들어왔다.

큰길가에 "만세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었고 국군을 향해 환호하고 박수를 쳐댔다. 가족들도 이제 좋은 세상이 왔다고 가슴을 쓸었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으로 연합군이 다시 후퇴해 전세가 또 역전됐다.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해 흥남철수작전을 강행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가족은 급히 피난 짐을 꾸렸다. 어머니는 피난을 나서기 전 집에서 키우던 소를 잡았다. 고기 일부는 주위에 나눠주고 일부는 장조림을 만들어 커다란 찬합에 담아 소년 이장영의 어깨에 짊어지게 했다. 이것은 함흥 피난길에서부터 거제도에 도착할 때까지 온 가족의 양식이었다.

1950년 당시 11살이었던 이장영씨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탈출하기 위해 올랐던 것으로 추측되는 상륙함 LST US 914호.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의 고문서 관리처 갑판부 일지 등에서 구한 자료
1950년 당시 11살이었던 이장영씨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탈출하기 위해 올랐던 것으로 추측되는 상륙함 LST US 914호.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의 고문서 관리처 갑판부 일지 등에서 구한 자료

■상륙함이 목숨 줄 같은 피난선으로

1950년 12월19일 밤, 피난길에 나섰다. 함흥에서 흥남부두행 기차를 타고 부두에 도착해 피난선을 타기 전인 22일까지 머물렀다. 이곳에서 남으로 데려다 줄 피난선을 무작정 기다린 것이다. 부두 주변에는 연합군 철수 소식을 전해들은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연합군이 수배할 수 있는 모든 배가 흥남 앞바다에 모여든다고 했다. 이 때문에 피난민들이 벌떼처럼 흥남부두에 모여들었고, 배에 오르기 위해 아우성치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목숨줄과도 같은 피난선에 올라타는 것은 또다른 전쟁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YMCA 소속이라고 외쳐라"고 일러줬다. 기독교인을 후하게 봐주던 미군들을 봐왔던터라 할아버지가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12월22일 저녁, 그의 가족은 피난선으로 둔갑한 LST상륙함에 드디어 올랐다. 그는 지금도 탱크와 포차 등이 배에 실려 있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했다. 

흥남항에서 출발한 LST상륙함이 며칠만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지만 하선은 허락되지 않았다. 부산 오륙도 앞바다에서 몇시간 동안 떠있다 거제도로 배를 돌린다고 했다. 부산이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이미 넘쳐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피난의 땅 거제는 우리를 품었다

12월25일 오후 거제도에 도착했다. 그제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주먹밥을 나눠줬다. 

도착한 피난민들은 먼저 장승포초등학교에 수용됐다. 이후 그의 가족은 거제면(당시 통영관할 거제읍)으로 배치됐다. 거제면, 지금의 제일교회 자리에 100여명이 보름간 임시로 머물다 국유지인 곳에 집을 짓게 해줬다. 

거제면 옥산금성 밑 소나무동산에 터를 잡았다. 나중에는 소나무가지와 진흙으로 흙벽집을 지어 1년8개월여 동안 온 식구가 머물렀다. 끼니는 배급된 밀가루로 수제비나 빵떡 등을 만들어 먹었다.

어른이 된 그는 힘들었던 그때가 생각 나 지금은 수제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비슷하게 보이는 떡국 같은 것도 절대 안 먹는다며 그때 너무 질리게 먹어서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러면서 피난생활 중에도 또래 아이들과 거제 옥산금성에 올라가 칼싸움하고 놀았던 기억도 얘기했다. 그때 피난민이 아닌, 원래 거제에 살던 사람들을 '본토백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은 피난민들을 대부분 잘 받아주고 품었다. 사춘기인 중학교 2∼3학년 때는 시가전처럼 패를 나눠 싸웠던 일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거제기성관 앞은 그 시절 거제도의 '명동'격이었다. 시장도 섰고 피난민촌으로 300세대 정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거제도 전역이 피난민으로 바글바글 했다. 

피난민들은 만약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없었다면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들 했다. 사람들은 포로가  공공활동을 위해 외부로 나올 때 그들을 상대로 물물교환을 하고 장사를 하기도 했다. 포로들은 배급받은 물품이나 피복을 팔기도 하고 교환 했다. 주민들은 POW(PRISON OF WAR)라 써 놓은 죄수복을 구해 염색해서 입기도 했다. 

1952년 봄이 되자 공산군이 내려올 기미가 안 보인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먹고 살 방편을 찾아 부산이나 마산·통영(충무)으로 흩어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그는 말했다. 
 
■11살 함흥 소년이 81살 거제 노인으로

LST US 914호. 그가 탔던 피난선이다. 영국 해군인 조카사위에게 부탁해 뒤늦게 알게 된 이름이다. 그는 이 배의 사진도 어렵게 구했다. 그는 "사진 속의 상륙함에서 그때 움켜잡았던 배의 난간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면서 "그 난간을 주먹이 터져라 거머쥐었던 소년은 이제 80대 노인이 됐다. 하지만 그 절박했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그는 피난민으로 거제에 첫발을 디딘 이후 학업과 사업을 위해 부산·서울 등지에서 살기도 했다. 하지만 운명처럼 거제도 장승포 처녀를 만나 결혼했다. 피난지였던 거제는 지금 그의 제2의 고향이 됐다. 현재 그는 부인과 함께 장승포동에서 마전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북5도민(함경남북도·평안남북도·황해도)거제시연합회 회장을 수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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