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입을 닫을 수 있다는 것이,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가 하고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을 잠시 참아보거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눈을 감아 잠시 잊어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조화가 예사롭지 않다. 그냥 지나쳐 무심코 사용해 온 인체의 구조가 삶을 사는 지혜로까지 연결된다. 입을 닫으라는 것, 말을 한다는 것, 분명 본인의 의지에 따라 닫고 열 수 있는 것인데 입의 쓰임에 따라 큰 파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아주 오래 전 아들이 들끓는 젊은 피를 이기지 못해 가출한 적이 있었다. 푸른 객기를 인정하지 못했던 나는 할 말을 잊어 조용했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처음에는 왜? 하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아들의 행동에 화가 났었고 시간이 지나자 제발 무사히 귀가해줬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바뀌었다.

명절이 돼 친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함부로 열린 입 때문에 씻을 수 없는 상처 하나를 얻게 됐다. 가족 중 한 명이 아들이 가출한 것은 다 부모의 잘못이라는 논리를 주장하면서 침체됐던 슬픈 감정은 더욱 가늠하기 힘들게 됐다. 쓰리고 아팠다. 감당하기 힘이 들어 자리를 피했다. 잘못된 언어 선택으로 남을 공격하는 것은 칼에 베인 상처보다 훨씬 오래 그리고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함부로 나온 언어 때문에 서로 갈라서기도 하고 심한 싸움을 이어가기도 한다. 머릿속에 저장된 많은 가짓수의 언어들 중에 선택해 입 밖으로 내게 되는데 상대하는 사람의 위치나 권력에 따라 입의 태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상대가 윗사람이거나 나보다 힘이 있는 자리에 있으면 선택되는 언어들은 아무래도 공손할 것이며, 만만한 상대이거나 별로 귀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들이 함부로 튀어나올 때가 많을 것이다.

'말을 뱉다'라는 의미는 상대를 멸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에서 배설하듯이 버리는 말의 언어인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침도 함부로 뱉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심장의 외부 결정체인 말을 함부로 뱉어서야 아름다운 인연이 되겠는가.

세상 말이 너무 거칠어 순하게 회복될 수는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갈등 밖으로 새어나오는 언어를 살펴보면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좋은 문화의 완성은 좋은 언어의 선택에 있다고 본다. 뉴스의 언어들이 너무 남성적이고 딱딱하다. 시적 언어, 혹은 여성적 언어는 강하지 못해서인지 선택되기 힘들다. 말은 반드시 논리적일 필요가 없으며 뉴스가 폭력사건을 전하면서 또다른 폭력적인 언어를 부추길 필요가 없다. 아무리 모순은 논리에 이기지 못한다지만 뉴스에 가끔 너무 논리적인 말보다 시적인 언어가 더 나오기를 바란다.

세상은 행동뿐만 아니라 말의 선택에서까지 분명한 취사를 요구하고 있다. 무엇을 했느냐 안 했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는 명확하고 논리적인 말 대신에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모순과 감수성이 공존된 생각도 존중 받았으면 한다. 이치적으로 보면 답답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 일이 모순이 아닌 게 어디 있냐 말이다. 부드럽고 향기 있는 시적 언어를 자주 접하다 보면 정치적이고 환경적인 문제나 개인적인 갈등 해결 방법에도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입을 연다는 것은 맑은 하늘의 기운을 담고 푸른 산의 정기로 다듬어지고, 영롱한 꽃의 향기가 베이며, 부드러운 언어들이 상대에게 가장 알맞은 하나를 꺼내 선물하듯이 건네는 것이지 뱉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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