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後漢)의 재상 조조는 살구를 좋아해 마당에 살구나무를 심었다. 살구가 익었을 무렵 어찌된 일인지 열매가 자꾸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는 머슴들을 모두 모아 놓고 "이 맛없는 개살구나무를 모두 베어 버려라!"고 했다. 그랬더니 한 머슴이 "이 살구는 맛이 참 좋은데 너무 아깝습니다"고 말했다. 조조의 재치로 살구를 따먹는 범인을 잡았다.

'살구와 개'는 많은 속설이 있다. '살구나무에 개를 오래 묶어두면 개가 죽는다' 또는 '개고기를 먹고 난 다음에 살구씨를 먹으면 탈이 안 난다' 등이다. 이는 '살구'를 '죽일 살(殺)'과 '개 구(狗)'로 갖다 붙인 탓이다. '살구'는 순우리말이지 한자어가 아니다. 살구의 한자는 '행(杏)'이다. 그래서 살구꽃 핀 마을을 '행화촌(杏花村)'이라 부른다. 이 행화촌은 '술집'으로 통하기도 한다. 당나라 때 이백과 함께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일컫는 두보(杜甫)가 술 생각이 나서 목동에게 술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牧童遙指杏花村·목동요지행화촌)'라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살구씨는 행인(杏仁)이라 해서 한약재로 쓰이고,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사를 행림(杏林)이라 한다. 이는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명의 동봉(董奉)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그는 산속에서 살면서 사람들을 치료해 줬는데, 환자들로부터 치료비를 받지 않고 병이 중한 사람은 살구나무 다섯 그루, 병이 가벼운 사람은 한 그루를 심게 했다. 몇년 후 그의 집은 십만여 그루의 살구나무숲을 이뤘다(杏林). 여기서 수확한 살구로 빈궁한 사람들을 돕는데 썼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평양의 가로수는 벚꽃이 아니라 살구나무다. 과거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평양을 복구할 때 김일성 주석이 벚꽃은 제국주의의 상징이라고 여겨 심지 못하게 하고 대신에 살구나무를 심게 했다고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노래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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