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금수사 주지스님

현실의 한국사회의 일만 민중들은 현세이익 기복성에 민감하다. 특히 현세 복락에 관심이 많다. 따라서 내세라든가 자유, 평화, 자비, 구원 등과 같은 관념적이고 윤리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같은 욕구들이 민중들에게 투영될 때 종교 또한 현실 중심적인 복락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본래 불교는 교리체계나 실천 수행자체가 현실 중심적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동 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 수도, 참선, 기도가 불교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한국불교는 현실 중심적이고 현세복락에 관심이 많다. 수행, 기도, 선에 서도 현세적 민중의 욕구심리가 투영되어 불교를 변질시켜 준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전통 기독교에서 출판한 여러 기독교 서적을 살펴 볼 때 전통 기독교는 경건한 묵상, 철저한 자기반성, 자기 자신의 내면의 빛이 지도적 양심이고 자각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는 전혀 수도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열렬한 믿음, 병고치기(안수기도), 소원이루기, 간증, 부흥회, 새벽기도 등은 한국교회만이 갖는 특별한 것이 아닐까. 한국 기독교의 비약적인 발전은 현세 이익성의 강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중들이 불교인이던 기독교인이던 심성의 밑바닥엔 기복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복성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 중심적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사실 종교 간의 평면적 비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특정사회, 특정지역을 기반으로 역사적·문화적 축적으로 언제나 진리성을 표현한다. 모든 종교인이 자기 종교의 진리를 추구함은 인간내면의 본질적 문제이다.

모든 종교인이 종교의 진리를 추구함은 별 문제가 없을 듯하지만 진리 자체를 표방하기에 문제가 복잡해 질수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족간의 종교 불화와 종교 갈등은 어떻게 해야 될까? 대부분 가족 간의 종교 불화는 관념적이라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가족 간의 종교 갈등, 종교 불화는 특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토론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가 있다. 

중요한 점은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해야 된다. 주요 대화 내용은 교리나 성직자, 성인 등의 기행, 신비함, 기적 등 외형적 형식이기 보다는 내면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즉 종교적 내면적 가치 기준이라야 한다. 권위나 지식에 의해서 상대방을 압도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백 마디의 교리 논쟁보다 묵상, 기도, 심방, 봉사 등의 기독교적 경험과 참선, 기도, 염불, 만행 등 불교적 체험 등 종교적 공통기반을 찾기 위해 대화해야 된다.

여기에서 공유할 점은 인정하고 종교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상대방의 종교적 가치는 내 신행 즉 종교생활에 보완이 될 것이다.

일반 민중, 가족들이 종교를 수용할 때 절대적인 종교수행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종교 수행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종교 수행은 자기 종교 이외의 타 종교의 교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독선에 빠질 수 가 있다.

하지만 상대적인 종교수용은 상식적이고 건전한 가치기준을 가질 수 가 있다. 현실의 종교들은 현세이익, 현세복락을 많이 추구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종교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유물적사고, 경제적 생산만을 추구하는 물신만능주의 또한 윤리 도덕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기는 퇴폐·향락주의이다.

현재 현실은 세계적인 자원부족 내지는 고갈, 무한경쟁, 암울한 정치현실, 북한 핵문제, 한미 FTA 등등이 암울한 미래를 예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 이상 세속적인 가치기준으로 세상을 살아야겠다는 것은 안된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중요시하고 자기 자신과 타인의 내면의 실상을 통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종교끼리의 외형적 비교나 우월적 논쟁은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각자에게 주어진 종교생활에서 진리를 통해가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 종파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을 것이고 우리들이 경쟁해야 할 것은 그 진리에 얼마나 근접하느냐에 달려 있어야 한다.

또한 얼마나 내면화 했느냐에 있다. 이런 마음가짐은 종교의 논쟁, 종교의 불화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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