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지금은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른들은 쌀 사러 가는데도 “쌀 팔러 간다”고 하고, 쌀을 팔러 갈 때는 “쌀 사러 간다” 또는 “돈 사러 간다”고 말했다.

어릴 때는 무슨 이유로 반대로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 따위를 잘못하는 경우 ‘참 자~알 한다’며 길게 늘어뜨려 말하는 경우의 반어법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럴만한 이유를 여럿 훑어봤는데, 반어법보다는 가난에 익숙했던 선조들이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했던 의식에서 발로된 표현이라는데 마음이 간다.

물건을 사러 가는데 팔러 간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먹는 양식에만 쓰였다. 쌀 팔러 간다, 콩 팔러 간다 등 곡식류에만 ‘사러 가는 것’을 팔러 간다고 표현했다. ‘판매’라는 행위 속에는 흥정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지만, 가난을 대대로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아왔으면서도 우리 민족이 체면을 중시했던 문화의 표출이자, 서러움을 감추고자 했던 넋두리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당장 먹을 쌀이 없어 구하러 가는 마당에 ‘쌀을 팔러 간다’고 말하면서 체면도 살리고 가난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을 위로받고자 했을 것이다.

얼마전 주요 쌀 생산국인 베트남과 인도가 쌀 수출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러시아도 쌀·밀·보리 등 모든 종류의 곡물 수출을 일정 기한 금지했다. 카자흐스탄도 밀가루를 비롯해 당근·감자·설탕 등 주요 농산물의 수출을 3월22일부터 금지했다. 중국도 국내 쌀 수매를 대폭 늘려 수출이 자동 줄어들게 되었다.

세계 주요 곡물 수출국들이 잠시나마 수출을 금지한 데는 최근 확산하고 있는 ‘코로나19’ 때문이다. 물론 이런 수출금지 현상이 장기간 계속되지는 않겠지만 주요 식량 수출국들이 잇따라 주요 먹거리의 해외 반출 금지가 주는 위기감은 크다. 태국·인도·베트남은 주요 쌀 수출국이다. 베트남이 지난해 수출한 쌀은 우리나라 한 해 생산량 374만 톤의 1.7배나 되는 물량이란다.

코로나19로 국가간 물자 이동이 어려워지면 자국산 농산물 반출을 중단하는 국가는 점차 늘어 날 것이다. 이는 식량 위기로 이어지고 ‘무기 전쟁’이 아닌 ‘식량 전쟁’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인류에게 식량이 무기화된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고 예측하기 힘든 거대한 위험이 될 게 뻔하다.

‘코로나19’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모든 일상을 잠식하고 말았다. 동료들끼리 음식점에 모여 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정담 있는 상황이 소중히 여겨진다.

그 많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함부로 여긴 곡물이 이제는 귀한 무기(?)로 변할 수 있다니 어쩌면 잃어버린 일상보다 더 위급하게 보존하고 지켜야 할 우리 농산물이 아니겠는가 싶다. 공산품은 이미 수입에 의존한 지 오래되었고 국산, 수입산의 구분이 큰 의미가 사라졌을 정도다. 식량도 쌀을 제외한 대부분 곡물을 수입에 의존해가고 있다. 이런 마당에 모든 식량이 전략적으로 무기화된다면 식량 자립도가 낮은 국가에서는 코로나 위기보다 더 극심한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전북 익산의 쌀이 홍콩으로 수출길에 올랐다는 뉴스가 그리 반갑기만 할 뉴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23%에 불과하고 전 세계적으로 식량안보가 위급한 시기가 도래한다면 총으로 싸우는 전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몇해 전부터 텃밭을 구입해서 직접 농사를 짓고 있다. 수확한 농산물을 요리해 먹는 행복이 땀 흘리며 수고한 노동을 감싸고도 남는다. 농산물 하나 가꿀 땅 한 뙈기가 소중하게 여겨지던 시절에야 비교할 수 없는 가치지만 내 입 하나는 건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식량 무기를 생산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세계 주요 곡물 수출국도 식량안보를 염려해 수출을 막는 것이 틀림없다. 가난과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쌀 ‘사러 가는 것’을 ‘팔러 간다’고 말 안 해도 되는 시절을 준비해야겠다. 가난한데 체면까지 구기서야 되겠는가.

서서히 태동하는 ‘식량전쟁’이 새삼 농업과 농촌의 소중함을 다시 되새길만한 기회다. 그래서 못 먹어도 푸짐해야 만족하는 정 담긴 음식문화가 음식 낭비로 이어지는 식문화를 바꿀 좋은 기회다. 농산물은 소중하게 보살펴 키우는 것이지 자동 생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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