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아마 못 믿을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 가치 없는 것을 소중한 것인 양 착각하고 거기 매달려 살아간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었고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랐기에 마지막에는 실망과 후회밖에 남을 것이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 믿을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믿어야 할 것은 믿어야 한다.

그런데도 당연히 믿어야 할 진실을 믿지 못하면 답답하다. 이런 사람은 자신도 괴로울 뿐 아니라 남까지 괴롭힌다.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면 하루에도 수십 번 전화를 해서 아내가 집에 있나 확인을 하니 아내가 피곤하게 된다. 믿어야 할 것은 믿어야 행복해진다.

우리는 지금 심각한 불신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웃조차 믿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생명은 믿음위에 세워진다. 지식도 지혜도 다 믿음 위에 근거한다.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일단 믿음을 전제로 하고 이루어진다.

요즘 차를 운전하며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반대쪽에서 오는 차가 중앙선을 넘어 내게로 오면 어떻게 하나? 신호등을 어기고 옆에서 차가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나? 믿지 못하면 불안하다. 믿지 못하면 운전을 할 수 없다.

믿어야 할 것은 믿어야 한다. 믿을 때에만 사실이 된다. 불 보듯 빤한 일도 내가 믿지 않으면 적어도 나에게는 사실일 수가 없다.

믿음이 없을 때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기독교의 생명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있다. 부활신앙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께서 역사 속에서 실제로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믿음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충만해졌기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심장이 멎었고 호흡이 끊어져서 생명체로서 완전히 죽으셨는데, 3일 만에 육체로서 생명체로 다시 살아나셨다. 분명하고 확실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두 번째는 종말론적 부활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도 마지막에 가서 모두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돼 살아나게 될 것을 믿는다.

셋째는 실존적 사건, 신앙사건으로서의 부활이다. 다시 말해 내가 오늘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부활이다. 부활이 먼 과거와 아니면 먼 훗날의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의 삶 속에 능력이 되고 힘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부활을 믿어야 한다. 부활을 믿을 때에 그 신앙이 ‘내가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옛사람에 대해 죽고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예수님의 제자중에 도마가 부활을 믿지 못할 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 주셨다. 못박히신 손과 창에 찔리신 허리를 확인시켜 주시면서 “너는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부활을 믿으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믿을 것을 믿을 줄 아는 사람, 믿는 체질의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우리는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어야 할 것은 믿어줄 줄 알고, 또 자신이 믿음이 가는 사람이 되어서, 불신의 세계에 믿음을 심어주는 믿는 자가 이 땅에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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