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아래 있는 피난민촌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북진할 때 중공군 개입으로 1951년 1월4일 후퇴를 하게 되자 공산치하에 살고 있던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남하를 하게 된다.

이때 흥남부두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배를 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후퇴하는 배에 피난민을 수송하기 위해 김백일 1군단장과 10군단 소속의 현봉학 민간인 고문이 에드워드 알몬드 10군 단장을 적극 설득해 많은 피난민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철수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가 됐다. 이때 거제도로 피난 온 사람들은 장승포항에 내려 거제도 곳곳으로 흩어져 살 곳을 찾아 걸었다.

그 당시 주민보다 많은 10만의 피난민이 왔다고 하는데, 정확한 숫자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교통과 통신·행정이 어려운 때라 파악이 어려웠다. 신분증도 없고 이름·나이를 속여도 알 수가 없었다. 마을마다 흩어져서 작은방이나 마구간을 방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다리 밑 등에 벼 짚으로 천막을 만들기도 하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천막을 쳐서 집으로 사용했다.

피난민들이 처음 왔을 때는 주민들이 먹을 식량을 나눠줬다. 얼마 후에 UN의 구호품으로 식량과 옷 등 생활용품이 보급돼 풍족했다. 피난민들은 그때 보급된 보급품 등으로 포로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포로수용소에서 흘러나온 옷과 생활용품이 부산으로 흘러가서 부산 돗대기시장과 국제시장이 생기게 됐다.

거제도에도 사등면 사곡과 연초천 등지에 미 군용품을 파는 시장이 생겼다. 이 사진은 거제 계룡산 아래 상동 용산 지역 산록에 만들어 놓은 피난민 촌이다. 이때 고현·수월·해명·양정 일대는 포로수용소가 설치돼 17만6000명의 포로가 있었고, 거제 전 지역의 마을과 마을 주변에는 피난민이 살았다.

피난 온 학생들은 거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피난민 선생도 있었다. 그 당시 북한의 생활수준과 교육 수준은 남한 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피난 온 사람들이 남한에서 군인·정치인·교육자·사업가로 많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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