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석 전 거제문인협회장

사랑은 애정만으로 잘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단 개인의 사랑에 대한 심각성만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오히려 인류의 기원과 온 생명을 일깨워주는 힘일 것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만 의사의 재능과 환자본인의 쾌유를 염원하는 의지가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 몸이 살아난다는 것은 쉽고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와 명령, 그 책임을 제때 온 몸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늘 불신하고 의심하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몫을 지나치는 슬픈 역사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국제사회에서 진정한 국익과 성취의 기저를 무시한 소아적 독재의 과신에 정신을 흐려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목마르게 평화를 외치며 정의와 공정에 눈을 부릅뜨고 살더라도 자칫 대의와 대동단결에 엇박자가 되고 있다면 이 또한 스스로 사랑과 진리와 행복을 위한 열정·애정·이념만 무성한 자승자업적 오류가 아닐까?

북한은 도발을 계속하고 있고 핵의 위협에 우리들은 번번히 할말을 놓치고 만다. 더는 서슴거릴 수 없는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 탓을 하기 전에 우리들은 강해져야 하고 자신감에 합치된 국익을 최선의 기틀 위에 세울 때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일 것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 사회는 법을 앞세운다. 그러나 법은 항상 구속력이 내재하기 때문에 불만과 반발이 유발되기도 한다. 이럴 때 의심없이 생각하는 것은 생체의 곧 우리 몸의 운신 역시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명에 연관시켜 더 조바심을 일으키게 됨은 고뇌가 짙어지는 것이다.

살려면 움직여라. 걷는 운동이 건강 비법의 예로 들기도 한다. 사람마다 경우에 따른 운동량의 종별적 단계적 이해가 필요하다. 무슨 운동이든 숨쉬는 것도 바른 자세에서 나아가야 한다. 바탕은 영원한 무일지라도 없으면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들은 긍정적 사고방식임을 잘 알고 있다. '법이 질서를 따르지 않고 질서를 법에 맞춰가는 우를 범한다'는 것은 요즘의 현실이기도 하다.  질서는 국민의 대동단결의 보루다.

구두가 먼저일가 발이 먼저일까? 우격다짐이나 포플리즘으로 발을 구두에 맞출 수는 없다. 정연한 순리와 질서가 의회법치로 지켜질 때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는 살아난다. 더욱 가열한 열망이 성급한 제도적 장치를 원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제도와 법이 총체적 책무에서 이 또한 국민의 총의적 발원에서 변혁이나 나아가서 혁명을 유발하기도 한다.

불의에 단호히 맞서는 결의가 없는 사람도 제 목숨을 본능적으로 도사리게 된다. 순간적인 집착은 끔찍한 악을 저지르고 만다. 실로 애처롭다기 보다는 어떤 이해와 용서도 이러한 경우에는 찾을 도리가 없다. 사적 감정을 내세워 함께 극악 무도해진다든가 이성에 돌아가서 여유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지옥이 따로 없다.

이러한 악의 고리를 끊고 악순환의 빌미를 태워버리고자 하는 순수한 의지가 법과 질서일 것이다. 법과 질서는 인위 위주로 명세화된 것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시적 문자보다 영원한 양심이 더 절실한 것은 아닐까

인간으로서 이러한 일에 상도 될 때 또한 인류의 긍지가 여기에 있다고 믿을 때 사람의 양심은 질서와 법으로 최고선의 것을 함부로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편가르기와 적대시가 예사로 자행되어서는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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