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에 약속이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렀다가 가기에는 어중간하다. 사무실에 있다가 시간이 되면 바로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7시 무렵이면 가방을 챙겨 약속장소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집으로 가 버린다. 집에 가서도 한참 후에 아내가 "당신 오늘 저녁에 무슨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했을 때야 비로소 '아, 참 그렇네, 깜빡했다. 요즘 내가 왜 이럴까?' 하며 혹시 치매는 아닌지 여간 걱정이 아니다.

물건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기 일쑤고, 단어가 퍼뜩퍼뜩 생각나지 않아 "그거, 그거" 하면서 대화가 끊기는 일이 잦다. 집을 나섰는데 문득 보일러를 끄지않은 것 같아 차를 돌려 다시 집에 와보면 보일러는 야무지게 꺼져 있다. 이럴 때 허망하기 그지없다. 치매와 건망증이 다르다고 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진다.

'치매(dementia)'의 영어 어원은 'de(지우다) ment(마음) ia(병)'을 뜻한다. 곧 '마음을 지우는 병'이다. 한자 '치매(癡)'는 '어리석을 치(癡)'에 '어리석을 매()'로 '바보같이 멍청한 정신상태'라는 뜻이다. 일본이 만들어 놓은 용어다. 음치(音癡), 길치(-癡), 몸치(-癡)가 있고, 천치(天癡)·백치(白癡)에다 치한(癡漢)으로도 쓰이는 글자다. 모두 좋은 뜻이 아니라서 나라에 따라서는 인지증·실지증·뇌퇴화증 등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는 '늙어서 잊어버리는 병-노망(老妄)'이라고 했다. 참 좋은 뜻인데도 "노망이 들었다" 하면 무슨 욕처럼 들려 치매를 노망이라고 부르기를 꺼린다. 특히 20대에도 알츠하이머가 생기는데 이를 두고 노망이라기에는 좀 그렇다. 아니면 '백심증(白心症)'도 괜찮다. 충격을 받거나 당황할 때 '머리가 하얗다'고 하듯, 어린아이와 같은 '하얀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정의·공정은 진영의 논리가 아니고, 상식의 가치인데 이것이 훼손되고 있는데도 분노할 줄 모른다면 이는 '가치의 치매'로 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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