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가을볕이 흘러내리는 잎들마다 고운 색으로 담겨 눈부시다. 알맞은 색끼리 서로 부딪히지도 않고 잎이 잎에게 가지가 가지에게 옮겨지는 시선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멀리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담은 논두렁이 농부의 손으로 잡풀이 곱게 다듬어졌다. 벼와 논두렁의 경계가 참 깨끗하고 가지런하다. 수확을 앞둔 농부의 마음가짐처럼 환하다. 큰 비바람 없이 한낮 비쳐지는 가을볕의 수고만으로도 알맹이가 단단해졌으면 하는데 멧돼지나 노루를 지키는 허수아비의 어깨가 순하고도 한가롭다.

태풍과 더위와 메마름을 잘 견뎌낸 가을 앞에 서서 농부의 마음을 다시 다잡는 행위가 논두렁 다듬는 것이라면, 그것은 수확을 앞둔 농부의 어떤 의식처럼 보인다.

종교인이 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처럼, 입대를 위해 길었던 머리를 버리는 일처럼,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수용돼지는 죄수처럼, 공부를 위해 머리카락 따위 과감히 버리는 다짐처럼 길었던 것을 자른다는 것은 새로운 일에 접어들기 전 개인적·사회적 약속이고 결기에서 비롯된 선언적 의미이다. 마치 목숨을 버리기로 한 큰 다짐처럼 머리를 자르는 의식을 통해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검은 교복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자유복을 입고 머리를 기를 수 있었다. 머리 모형이 못생긴 나로서는 참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거추장스런 검은 교복과 검은 모자를 더이상 입고 쓰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과 자유를 누리고 다녔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머리를 빡빡 밀게 됐는데 순전히 개인적인 결단이었다.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순진한 다짐이었다. 가장 쉬운 방법이고 내 의지를 남에게 피력할 수 있는 강한 표현이라 믿었다.

두 번째 삭발은 군 입대를 앞둔 하루 전이었다. 긴 머리를 버리는 안타까움보다 군대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으니 삭발이 주는 감정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극도의 긴장감에 아플 만큼 추웠던 기억이 있다. 적어도 내게 삭발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작점이었고 마음을 다시 잡는 의식이었다.

카푸치노는 이탈리아 수도사 중에 카푸치니 수도들이 있는데 갈색옷을 입고 머리 일부분만 남기고 가운데를 삭발한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카푸치노와 비슷한데서 유례됐다고 한다. 커피 위에 올리는 흰거품이 프란체스코의 카푸친 수도사들이 쓰고 다니는 모자와 닮았다고 해서 '키푸치노'라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종교인의 삭발에서는 경외감과 수행자의 결의가 엄중함을 느낀다. 수술을 앞둔 암 환자나 백혈병 어린이의 삭발에서는 도저히 참기 힘든 슬픔이 솟구친다. 죄수들의 삭발은 직접 볼 기회가 없었으나 죄의 양만큼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참담하고 무거웠으리라.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항거의 표시로 삭발을 감행했던 적이 있다. 요즘은 연예인들이 유행이나 패션으로도 일부 삭발을 하기도 한다. 비듬이 많거나 탈모가 심한 사람의 삭발은 차라리 편하기라도 하겠다. 그리해 삭발은 결의나 다짐에 따른 선언적 의미가 있어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요즘 희화화되고 릴레이 하듯 이어지는 정치인들의 삭발은 얼마만큼 결기 차고 무거울까? 보여주기식 삭발이나 공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서 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세상을 위한 깊은 선언적 의미나 결기는 없어 보인다. 카푸치노 깊은 향에서 따뜻한 온기가 빠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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