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거제포로수용소, 유네스코 등재와 관광자원화 ⑤]
20세기 대학살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서, 유산의 가치를 찾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잔인함 없이 숙연하게 만들어...어떻게 보여주느냐의 '차이'
유럽권 청소년 필수 수학여행지...'기록·기억 = 평화'로 의미 전달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 전경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 전경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인간의 잔혹성과 야만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준다. 이곳은 단순히 죄 없는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노동을 강요한 곳이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곳으로 온 인류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피 한 점, 유골 등 잔인할 수 있는 소재는 볼 수 없다. 당시를 상상하게 만드는 공간만이 보여줄 뿐이다. 하루 수천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지만, 소음은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당시 역사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모두 숨죽여 현장을 지켜볼 뿐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35도의 6월 날씨에도 그늘 하나 없는 그 공간에서, 그 누구도 다른 첨언을 할 수가 없는 건, 70여년전 당시 수용자들은 더 최악의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3개의 수용소가 존재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운데 2곳만이 남아 있는 현재, 수용소는 각기 다른 형태로 인류의 잔혹함·처참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비르케나우 수용소 정문을 통과하는 기차선로는 당시 수용소에 들어선 인원을 짐작케 한다
비르케나우 수용소 정문을 통과하는 기차선로는 당시 수용소에 들어선 인원을 짐작케 한다.

부끄러운 인류의 흔적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0년 5월20일에 완공됐고, 1940년 6월14일 폴란드 정치범들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 옛 수도인 크라쿠프에서 2㎞쯤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아 현재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이보다 3㎞ 떨어진 곳에는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인원은 평균 1만8000명인데 비해 비르케나우 수용소에는 36만명이 수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됐던 만큼 비르케나우 수용소 생활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해 훨씬 참담했다. 당시 비르케나우에는 36만명이 수용됐는데 건물은 약 300동으로, 한 막사 안에서 1000명이 넘는 수용자들이 생활한 것으로 유추된다.

두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 가운데 바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강제 노동을 한 이들은 극히 드물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극히 일부는 살아서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대부분은 강제 노동 중 세상을 떠나거나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30개국에서 강제로 끌려온 4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우슈비츠는 고압 전류가 흐르는 이중 철조망과 출입자를 확인했던 검문소, 수많은 수용자를 실어 나른 검은 화물 열차가 달렸던 선로, 탈출자를 막고 수용된 사람들을 감시했던 기관총이 설치된 초소 등 입구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수용소가 폐쇄된 지 67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입구부터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초원 위로 300동에 달하는 막사와 그 막사에까지 도달하는 선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현장에서 손가락 하나만으로 생사를 가르고, 가스실과 소각실로 나누던 현장의 흑백 사진이 현재에까지 고통을 안겨준다.

나치군을 물리친 소련군은 독일군이 미처 흔적을 없애지 못한 가스실을 무너진 상태로 그대로 둬 정치적 의미를 전달했고, 이는 현재 교육적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치군을 물리친 소련군은 독일군이 미처 흔적을 없애지 못한 가스실을 무너진 상태로 그대로 둬 정치적 의미를 전달했고, 이는 현재 교육적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지는 가스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장 큰 건물인 취사장 뒤편에는 인체 실험실로 사용했던 건물이 있다. 오늘날 전 인류가 나치스의 만행에 치를 떠는 이유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부족해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옆 서쪽 벽은 교수형과 총살이 이뤄졌던 장소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건너편에는 샤워실로 불리던 가스실이 있다. 샤워실로 불린 이유는 수용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갖고 있는 소지품을 그대로 들고 간 이후 씻기 위해 옷을 모두 탈의하면 그때 가스를 틀어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제1수용소에 가스실 하나, 제2수용소에 가스실 2곳이 설치됐다. 나치가 물러나고 폴란드에 자리 잡은 소련군은, 독일군이 퇴각 당시 폭발시킨 가스실을 그대로 유지해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 해놓았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 내에 있는 위령탑. 누군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장미꽃을 가져다놨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 내에 있는 위령탑. 누군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장미꽃을 가져다놨다.

새로운 희망

당시의 참혹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폴란드 의회에서는 지난 1947년 독일 나치스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를 보존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비르케나우 수용소 남쪽에 위령탑을 세우게 됐다.

이곳에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연간 2번씩 대규모의 유대인 추모식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위령탑 앞에는 방문객들이 남기고 간 장미와 향초가 늘 자리하고 있다.

세 곳의 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은 약 400만 명에 이른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이고 신원불상의 이들을 합치면 그 수치는 더 많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유대인의 죽음이 가장 많이 알려졌을 뿐, 실제는 소련군이 가장 많이 사망했고 두 번째로 유대인, 세 번째가 폴란드인으로 현재 추정되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보면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유럽권 청소년들의 수학여행 시기인 5~6월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청소년들이 방문한다. 폴란드 청소년들 다음으로 독일에서 온 학생들이 가장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심경섭 아우슈비츠 전문 통역사는 "폴란드 청소년은 이곳을 방문하면 자국의 처참한 아픔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자각'과 이 비참한 과거 속에서 현재의 나라로 일으켜 세웠다는 '자부심' 등을 느낀다"면서 "반면 독일 청소년은 나치스의 만행에 대해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죄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옛일을 반성하고 기도하는 현장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심 통역사는 "아우슈비츠는 유대인만의 아픔이 아닌, 유럽 전역의 아픔이 담겨져 있는 곳으로 그 아픔의 현장이 기록을 통해 기억을 함으로써 분노가 아닌 '평화'의 존재로 자리하는 것이 이 공간에서 유럽이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가장 의미 있는 행위"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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