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과 춘래불사춘
대우조선과 춘래불사춘
  • 거제신문
  • 승인 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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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태 편집국장
백승태 편집국장

민족시인 이상화는 일제 강점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로 나라를 빼앗긴 식민치하의 민족현실을 '빼앗긴 들'에 비유하며 울분을 토했다. 이 시는 1926년 '개벽(開闢)' 6월호에 발표된 시로 작자의 뜨거운 열정과 날카로운 현실감각으로 민족혼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봄'이라는 희망적 시어로 대한독립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

그로부터 93년이 지난 현재 거제지역에도 이 시가 자주 오르내린다. 장기적인 조선산업 침체 등으로 지역경기가 수년째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다, 대우조선해양의 매각 소식이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흔히들 경제가 어렵거나 힘든 시기에 봄이 오면 이 시를 비유하는 것처럼 봄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고사성어 중 하나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란 뜻의 춘래불사춘은 북방의 흉노족에게 억지로 시집을 간 중국 한나라 때 궁녀 왕소군(王昭君)의 심경을 헤아리며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쓴 시 '소군원(昭君怨)'에 나오는 대목이다.

고사에 의하면 중국 한나라 원제는 초상화를 보고 궁녀를 뽑았다고 한다. 왕소군은 양귀비와 서시·초선과 함께 고대 중국 4대 절세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하지만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초상화가 못생기게 그려지는 바람에 간택되지 못했다. 그러다 북방 흉노족이 화친의 대가로 미녀를 바치라고 요구했고, 원제는 가장 못생긴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왕소군을 실제 보니 엄청난 미인이었다. 이에 화가 난 원제는 화공을 처형해 버렸다.

결국 오랑캐 땅으로 시집간 왕소군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어렵게 살았고 그의 심경을 헤아린 시가 바로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이다. '오랑캐 땅에는 풀과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뜻으로 좋은 시절이 왔어도 상황이나 마음이 아직 여의치 못하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한탄하고 있다. 추운 북쪽 지역의 땅에서는 춘삼월이 되도 꽃이 피지 않으니 봄이 봄 같지 않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우리 거제도 완연한 봄을 맞았다. 지난 6일에는 거제의 명산 대금산에서 진달래 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또 며칠 후면 양지암 축제가 열리는 등 봄을 알리는 각종 행사들이 이어질 것이다. 겨울동안 움추렸던 마음과 어깨를 펴고 희망찬 앞날을 열어가자는 소망을 함께 나누는 소중한 자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얼마전 퇴근길 한 잔 술에 '빼앗긴 들…'을 읊조리며 춘래불사춘을 되뇌이던 50대 가장의 넋두리가 가슴에 사무친다. 그는 거제의 현실을 비춰볼 때 춘래불사춘이라는 고사가 지금 딱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했다.

봄은 왔지만 삶이 팍팍하고 지역현실이 녹녹치 않다는 얘기다. 회생기미를 보이지 않는 지역경제가 그렇고 핵폭탄처럼 날아든 대우조선의 동종사 매각 소식이 오려는 봄을 가로막고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거제의 봄을 빼앗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월급을 삭감하며 버텨왔고, 이제 정상화가 눈앞에 보이는데 갑자기 날아든 산업은행의 대우조선매각 소식이 비수로 다가와 노동자 모두가 좌불안석이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현대중공업이라는 동종사에 매각될 경우 예견되는 대규모 구조조정과 기자재 납품업체들의 줄도산은 거제를 넘어 경남 전체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갈 것이라는 것은 노동조합과 언론보도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아무리 꽃이 피고 새가 운다 한들 이런 분위기에서 어느 누가 봄을 느낄 수 있을까'라며 반문하기도 했다.

고향 거제에서 태어나 대우조선에 입사해 열심히 일만하고 처자식 돌보며 알콩달콩 살았다는 그는, 이제 가족과 회사와 지역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그 첫 번째 행동으로 오는 10일 옥포중앙시장사거리에서 예정된 대규모 집회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했다. 매각 반대를 외치며 지역민과 함께 빼앗긴 거제의 봄을 찾는 일에 매진할 각오라고 했다.

봄은 왔건만 거제의 봄은 아직 멀리 있고, 대우조선과 지역경제가 되살아나야만 참다운 거제의 봄이 올 것이라는 50대 가장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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