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에서 장승포 쪽으로 가면 대우병원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거기가 두모고개인데 옛날 그 고개에 장승이 서 있었기 때문에 '장승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영조 45년(1769)에는 고현면 이운에 소속된 10방 중의 하나인 '장승거리'라 불렀다. 그 후 고종 26년(1889)에 고현면 이운을 이운면으로 독립하고, 지명도 장승거리에서 장승포로 바뀌게 된다. 그런 탓에 지금 장승포 입구에는 지역의 상징인 석장승 두 개를 세워두고 있다.

그럼 장승이 무엇인가?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 때 나라의 길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역참(驛站)제도를 도입한다. 이후 조선시대 큰길에는 우역(郵驛)이 있었고, 그 밖의 길에는 이정표 기능을 하는 장승(댱승)을 세웠다. 장승의 가슴에는 현재의 위치, 이웃마을의 이름과 거리 그리고, 방향을 표시하여, 나그네와 벼슬아치들에게,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안내해 주는 푯말(이정표)이 주요 기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승의 역할은 1895년 새로운 우편제도가 도입되면서 우리 땅에서 사라졌다.

우리 땅에는 장승이 없다. 대신에 마을을 지켜주던 벅수를 장승으로 왜곡시켜 놓았다. 지금 서 있는 장승들은 장승이 아니라 '벅수'다. 벅수보고 장승이라 부르고 있다. 참 벅수 같은 짓이다.

그럼 벅수는 무엇인가? 얼굴이 험악하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는 벅수는, 마을 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악귀와 질병을 막아주는 수호신 구실을 하던 것이다. 이건 오랜 우리 문화다. 이 벅수를 1933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들면서 없는 장승을 표준어로 삼고, 벅수는 미신이라고 없애버렸다. 그러면서 벅수의 기능을 모두 장승으로 둔갑시켜 우리문화의 말살을 획책한다.

본래 장승은 단독이고 벅수는 쌍으로 세웠다. 더구나 조선시대 만들어진 벅수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제는 우리 문화에도 없는 천하대장군과 천하여장군이라는 정체불명의 장승남녀로 탄생시켜 놓았다.

우리는 이제 벅수에게 제 이름표를 달아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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