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0주년】 거제지역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아 ②
애국지사 손녀가 들려주는 할아버지 '유진태'

3.1운동 100주년과 8.15광복 74주년을 맞았건만 아직까지 선열들의 피맺힌 항거 사실을 후손들이 전부 알기는 역부족이다. 부족한 정성과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이라 자책하며 거제신문은 지역에서 일본의 총칼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독립유공자의 발자취를 재조명해 그분들의 얼을 기린다. 거제신문은 창간 30주년을 맞아 기획시리즈로 거제지역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찾아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직접 듣고 자료를 수집해 연재하면서 오늘을 사는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그분들의 의기를 널리 알린다. 유공자 후손들에게도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편집자 주


유진태 할아버지의 관련기록은 유경희 할머니의 남동생이 하나씩 모아서 형제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유진태 할아버지의 유골은 지난 2006년 독립유공자공적심사를 통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사진 제일 왼쪽부터 할아버지의 기록을 모아놓은 파일과 현충원 비석(사진 가운데), 유진태 할아버지 유골 이장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유진태 할아버지의 관련기록은 유경희 할머니의 남동생이 하나씩 모아서 형제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유진태 할아버지의 유골은 지난 2006년 독립유공자공적심사를 통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사진 제일 왼쪽부터 할아버지의 기록을 모아놓은 파일과 현충원 비석(사진 가운데), 유진태 할아버지 유골 이장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중국에 자주 오가는 골동품 할아버지

애국지사 유진태(1880.03.18~1944.03.02)의 손녀 유경희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워낙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생전에 기억하는 모습은 많지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곳도 우리나라가 아닌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중국의 만주(滿洲)에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주곤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 전부이다. 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후로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키가 좀 크시고 건장하셨던 것 밖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할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도 몰랐고, 집안에서도 쉬쉬 했어요. 엄마한테도 물어봤는데 그냥 골동품가게를 운영하는 정도로만 이야기를 해줬고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해방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만 해도 순사들에게 끌려가던 시절이어서 가족들에게도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활동했다고 한다.

독립운동 자금책을 맡았던 유진태 애국지사의 손녀 유경희 할머니.
독립운동 자금책을 맡았던 유진태 애국지사의 손녀 유경희 할머니.

해방 후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할아버지는…

해방 이후 어머니(애국지사의 며느리)로부터 전해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단체들에게 골동품 수집·판매상으로 위장해 이들에게 자금을 조달·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것과, 조금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중국을 자주 오갔다는 것이 전부였다.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만큼 은밀하게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조부는 만주에서 돌아가셨고 묘지도 그곳에 있었다. 유골은 유 할머니의 동생이 수습해 선산에다 모시다가 2007년 독립유공자공적심사를 통해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게 됐다고 한다.

3.14 공주 유구시장 만세운동으로 옥고 치러

유 할머니의 조부 유진태는 1919년 3월14일 공주에 있는 유구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벌였다는 이유로 일본순사에게 잡혀 옥고를 치르게 된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그해 3월1일 민족대표 33인으로 잘 알려진 손병희가 경성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에 공주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경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황병주를 체포해 경찰관 주재소로 연행됐는데 석방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재소 사무실에 들어가 난동을 부렸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이 일로 징역6월 벌금 30원(현재 3000만원 추정)을 선고받게 됐다.

유진태 할아버지의 공적내용이 수록된 공적 심사자료와 1919년 3월14일 공주 유구시장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를 당시의 판결문. 이 판결문에는 함께 옥고를 치른 사람들의 명단, 당시의 죄명, 진술내용 등이 기록돼 있다.
유진태 할아버지의 공적내용이 수록된 공적 심사자료와 1919년 3월14일 공주 유구시장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를 당시의 판결문. 이 판결문에는 함께 옥고를 치른 사람들의 명단, 당시의 죄명, 진술내용 등이 기록돼 있다.

짧은 중국생활, 해방 후 돌아온 우리나라

유 할머니의 가족은 해방이 되기 전 중국 톈진(天津)으로 넘어가 생활하게 된다. 가족 모두 건너가게 되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 어린 막내동생과 할머니를 남겨두고 건너갔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넘어가 정확하게 어떤 이유로 가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중국에서 1~2년간 생활하던 도중에 해방소식에 다시 충청남도 공주로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유 할머니의 부친은 건축회사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대전에 있는 한국은행 건물을 신축할 당시 아버지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어 그 영향으로 한국은행해서 9년간 근무를 하게 됐고 이후에는 국민은행에서 5년간 일을 했다고 한다. 가족·친척들은 대부분 서울·경기 지역에 살고 있는데 초등학교 교사였던 남편을 만나 경남지역으로 내려와서 생활하게 됐다고 한다. 남편은 중매를 통해 만났는데 경남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사람이 좋아 결혼하게 됐다고 한다.

사는 것이 바쁜 탓에 애국지사인 조부에 대한 기록들을 꼼꼼히 챙겨볼 수가 없었지만 남동생이 관련 기록들을 모아 가족들에게 나눠줘서 보관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8남매 중 둘째로 원래는 큰 오빠가 애국지사의 혜택을 받고 있었는데 돌아가시면서 할머니가 이어받게 됐다고 한다. 국가유공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귀가 어두워지고 무릎에 이상이 생겨 많이 다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날에는 거제 여기저기를 다녀보고 싶단다. 남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서 생활을 하게 됐고 지금은 딸·사위와 같이 생활하면서 손자·손녀를 보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유 할머니는 "조상들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강요할 순 없지만 아이들이 찾아볼 수 있도록 기록해두고 알려주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가지고 있는 기록들은 대대로 물려주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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