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도 조선, 뼈도 조선…죽어도 조선" 노랫말에 아버지 옥살이
"피도 조선, 뼈도 조선…죽어도 조선" 노랫말에 아버지 옥살이
  • 이상화 기자
  • 승인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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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30주년】 거제지역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아
미완성 책 '믿음의 길' 쓰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기억하는 아버지 진병효 목사

3.1운동 100주년, 8.15광복 74주년을 맞았건만 아직까지 선열들의 피맺힌 항거 사실을 후손들이 전부 알기는 역부족이다. 부족한 정성과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이라 자책하며 거제신문은 지역에서 일본의 총칼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독립유공자의 발자취를 재조명해 그분들의 얼을 기린다. 거제신문은 창간 30주년을 맞아 기획시리즈로 거제지역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찾아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직접 듣고 자료를 수집해 연재하면서 오늘을 사는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그분들의 의기를 널리 알리고, 유공자 후손들에게도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편집자 주


할아버지 때부터 손자까지 5대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진형봉 목사. 아버지 진병효 목사가 '조선'이라는 노랫말을 쓰고 일본군에 끌려가 징역을 살았던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해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손자까지 5대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진형봉 목사. 아버지 진병효 목사가 '조선'이라는 노랫말을 쓰고 일본군에 끌려가 징역을 살았던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해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믿음의 길' 진형봉 목사

화창한 봄날 자택에서 만난 진형봉 목사는 1932년 출생(7월15일생)한 고령의 나이에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건강함의 비결로는 따로 시간 내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걷고 무엇보다 가정의 평안이 최우선이라고 믿고 있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손자까지 5대에 걸친 목회자의 길을 걸어오고 있는 진 목사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겼다고 설명했다.

한국전쟁 당시 입영통지서를 받고 형님과 함께 전쟁에 참전했지만 형님은 전쟁 통에 사망하고 본인은 부상당해 전역했다. 부상당시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포탄 2발이 참호 양쪽에 떨어져 부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양쪽 목과 옆구리에 파편 6곳이 박혔는데도 목숨을 부재할 수 있었던 것은 살아서 하나님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믿었다.

진 목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본인이 걸어온 발자취를 기록한 '믿음의 길'이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고 있다. 일제의 탄압에도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온 선대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만들고 있는 미완성 책이다.

책은 마치 여느 집안의 족보를 기록한 책처럼 선대의 활동을 입증할 자료들과 사진, 그리고 후대 가족사진 등으로 채워졌다. 미완성 본이라고 칭한 것은 앞으로 기록할 내용들이 삽입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41년 10월 통영군 원량면 읍덕리 예배당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이 부를 노래가사를 적어달라는 요청에 '조선'이라는 제목의 가사를 적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언도받은 진병효 목사. 오른쪽 사진은 진 목사가 적은 노랫말.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뼈와 피가 태어난 조선, 죽어도 조선, 너희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 조선에서 사는 자, 양 어깨를 펴고 나아가자, 조선에서 사는 자, 마음도 조선, 혼도 조선, 이 마음 이 혼, 좋은 조선 슬픈 조선 너도 조선 사람이라고 우리의 온몸과 온 정신은 전부 조선이다'
1941년 10월 통영군 원량면 읍덕리 예배당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이 부를 노래가사를 적어달라는 요청에 '조선'이라는 제목의 가사를 적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언도받은 진병효 목사. 오른쪽 사진은 진 목사가 적은 노랫말.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뼈와 피가 태어난 조선, 죽어도 조선, 너희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 조선에서 사는 자, 양 어깨를 펴고 나아가자, 조선에서 사는 자, 마음도 조선, 혼도 조선, 이 마음 이 혼, 좋은 조선 슬픈 조선 너도 조선 사람이라고 우리의 온몸과 온 정신은 전부 조선이다'

>> 남다른 체구의 부친 진병호 목사

조부 진종학 목사(1882.02.03~1978.09.26)는 장로회 신학대학교 19기로 사등·덕호·연사·유천·황포·구영교회 등을 순회하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천황을 신으로 떠받드는 일본인들에게 식민지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루는 경우가 허다했고 감옥에서 반일투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44년 12월을 전후로 조선인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핍박으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부지도자들은 일제에 항복해 친일행각을 전개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던 조부의 영향으로 부친 진병효 목사(1901.08.24.~1961.05.05.)는 1920년 3월5일 영국인 선교사 왓슨(Robert D. Watson)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믿음의 길' 책안에 수록된 부친의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던 진 목사는 부친이 사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체구가 남달랐고 힘이 셌다고 말했다. 과거 옥포선창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 부친이 무거운 바윗돌도 맨손으로 실어 나르고 했다며 건장했던 부친의 생전 모습을 회고했다.

진형봉 목사 집안의 1대 목회자이자 할아버지인 진종학 목사와 할머니
진형봉 목사 집안의 1대 목회자이자 할아버지인 진종학 목사와 할머니

>> 일제의 탄압에도 우리는 '조선인' 외쳐

부친 진병효 목사는 1941년 10월 초순 통영군 원량면 읍덕리 예배당에서 순회전도를 할 때 예배당의 주일학교 아이들이 부를 노래가사를 적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아이들에게 만큼은 일제의 탄압과 억압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일까, 가사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인들이 문제 삼기에 충분했던 내용의 가사를 만들어 교회 벽에 게시했다.

'조선'이라는 제목의 노래가사인데 일제의 탄압에도 조선인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가사다.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뼈와 피가 태어난 조선, 죽어도 조선, 너희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 조선에서 사는 자, 양 어깨를 펴고 나아가자, 조선에서 사는 자, 마음도 조선, 혼도 조선, 이 마음 이 혼, 좋은 조선 슬픈 조선 너도 조선 사람이라고 우리의 온몸과 온 정신은 전부 조선이다.'

이 일로 진병효 목사는 1942년 2월10일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언도 받는다. 이후에도 1945년 6월5일에는 금지된 찬송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등을 불렀다는 이유로 거제경찰서에 구금돼 해방 이틀 전인 8월13일에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석방당일 진 목사는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경찰서 앞에 갔지만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부친의 모습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했다. 만신창이가 된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온 진 목사는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 산으로 뱀을 잡으러 다녔다고 했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200여 마리 정도를 잡아 약으로 썼다고 기억했다.

>>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일제의 탄압

부친이 석방되고 8월15일 광복을 맞이했지만 거제에서는 일본인들의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해방소식에 여기저기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곤 했지만 낮에는 자유롭게 만세운동을 할 수가 없었고 주로 밤에 사람들이 모여 만세운동 벌였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경을 일반시민이 이겨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 목사는 해방 이후 축하 예배일을 잊지 않기 위해 당시의 일들을 회상하며 기억나는 것들을 펜으로 기록해뒀다.  "해방 이틀 뒤인 1945년 8월17일 12시 해방 축하예배를 위해 옥포교회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설교가 시작됨과 동시에 일본순사가 착검을 하고 나타나 교회 출입구를 막아섰다. 장화를 신은 헌병이 강단에 올라가 아버지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당시 교회 집사가 몰수한 성경책과 찬송가를 어디론가 가져다주라고 지시해 책들을 짊어지고 가보니 한국인 순사가 있었다. 순사가 하는 말이 다시 짊어지고 가라고 지시해 도로 들고 왔다. 어떻게 교회에서 순사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때가 광복절 축하 예배였다"고 회상했다.

부친이 환갑의 나이에 일찍 돌아가신 이유에 대해 진 목사는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고문을 심하게 당해 몸이 많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부친에 대한 기억보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처음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우연히 전도사 시험을 보게 됐는데 합격통지를 받게 됐다. 시험에 대해 합격사실을 알리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께서 지그시 웃으시면서 "그 길은 걸어가다 보면 다 열리는 길"이라는 말에 1977년 장로회 신학대학을 70기로 졸업하고 목회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진형봉 목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본인이 걸어온 시간을 기록한 책 '믿음의 길'(사진 아래). 일제의 탄압에도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온 선대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만들고 있는 미완성 책이다.
진형봉 목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본인이 걸어온 시간을 기록한 책 '믿음의 길'(사진 아래). 일제의 탄압에도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온 선대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만들고 있는 미완성 책이다.

>> 인터뷰를 마치며

진 목사는 모든 일에 있어 가정이 평안해야 한다는 것을 수차례 강조했다. 집안에서 불화가 생기면 밖에서도 불화가 생기고 가족 전체에 전염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나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부터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 대해서는 본인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어려운 삶을 살아왔지만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도 나름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며 각자의 위치에서 본연의 일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만이 성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쯤 진 목사는 국가유공자증들을 내보이며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조금은 야박한 것이 사실이라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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