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1965년 장승포 위쪽 능포에서 내려오는 계곡에서 빨래하는 장면이다. 당시 장승포와 능포는 바닷가 한적한 마을로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농경시대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어패류 보다 식량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농사를 위주로 살았다.

장승포는 1889년 한일통어장정이 생긴 후 일본어민들이 들어와 거주했다. 해방 후 일본사람들이 물러가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북한 피난민들이 많이 살다가 부산·서울 등지로 가고 텅 빈 마을이 됐다.

옥수동에는 두서너 집이 살았고, 능포는 20여호, 장승포는 마전을 포함해서 약 50여호가 살았다. 그 당시 능포의 앞쪽 들판과 장승포 옆의 작은 개천은 옛 시골의 쓸쓸한 모습 그대로다.

졸졸 흐르는 작은 고랑 물가에서 마을 부녀자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그 당시는 한복을 입고 생활할 때다. 여자들의 윗저고리는 흰색이고 아래 치마는 검정색이다. 남자들은 흰색 한복을 입고 일을 했다. 일하면서 흰옷에 묻었던 때를 냇가에서 빨래 방망이로 두드리며 씻어 낸다.

당시는 비누도 귀했다. 양잿물에 부드러운 쌀겨를 태워 재를 만들어 검정색 비누를 만들어 사용했다. 날씨가 좋은 날 빨래를 해 냇가 나뭇가지에 걸어서 말렸다.

빨래터에는 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교향곡처럼 울려퍼지기도 했다. 그때는 겨울에도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찬물에 빨래를 했다. 엄마들이 빨래를 하는 동안 따라온 꼬마들은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다슬기를 잡으며 물놀이를 하기도 했다.

시골 빨래터는 동네서 일어나는 일들이 방송처럼 전달된다. 농경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빨래는 피해갈 수 없는 노동이었다. 그 당시 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일을 배운다.

세탁기가 없고 빨래비누도 없을 때 여자들이 제일하기 어려웠던 것이 겨울의 한복 빨래다. 꽁꽁 언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면, 빨래가 얼음에 붙어서 떨어지지도 않고 찬물이라 때도 잘 가시지 않는다.

빨래를 수북이 담은 대야를 머리에 이고 냇가 소로를 걸어서 다니며 꽁꽁 언 손을 녹이기 위해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지피기도 했다.

얼룩지고 때 묻은 마음의 빨래들도 다 끄집어내 툭툭 탁탁 방망이질 하고 술렁술렁 헹궈 너럭바위에 널어 말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지쪽 언덕에 벌러덩 드러누우면 눈이 알싸하도록 푸른 하늘이 보이는 빨래터의 어린 시절 추억이 이 사진을 통해서 솟아난다. 사진에서 보이는 이곳은 지금 새 도시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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