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의 경매가격은 얼마나 될까?

1936년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나온 18세기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병'이 당시 경매 최고가로 화제를 모았다.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 정도였던 시절인데 경매 시작부터 끝까지 따라붙는 일본인 대수집가 야마나카(山中)와 열띤 경쟁 끝에 간송 전형필 선생이 1만4589원에 낙찰 받았다. 그 후 어느 일본인 상인이 와서 10만엔에 사겠다는 것도 거절하며 우리 문화재를 지켰다. 이 병은 지금 국보294호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백자가 외국 경매에서 고가로 팔린 것은 1994년 크리스티 옥션에서 15세기 '청화백자당초문접시'로 308만달러(당시 우리 돈 약 26억원)에 낙찰됐다. 그리고 2년 뒤인 1996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17세기 '철화백자용무늬항아리'가 765만달러(당시 우리 돈 약 64억원)에 낙찰돼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을 일컬어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한국만 갖고 있었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반한 일본의 영주들이 경쟁적으로 도공들을 잡아갔기 때문이다. 기술을 천시했던 조선에서의 도공은 자기가 만든 작품에 이름도 새기지 못하는 천민에 불과했지만, 일본에 잡혀간 조선 도공들은 영주들의 극진한 지원 아래 마음껏 예술성을 살릴 수 있었다.

일본사람들의 백자 사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전국 각지에 있는 도자기를 수집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왕창 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조선은 초기부터 왕자나 공주의 태(胎)를 길지를 잡아 봉안하는 태실이 있었다. 태를 담는 그릇은 당연히 관요에서 만든 최고급 도자기였다. 1929년을 전후해서 조선총독부는 망국의 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에 있는 태실을 경기도 고양군 서삼릉으로 옮기게 한다. 이때 대부분의 태항아리는 질그릇으로 바꿔치기 당한다.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曹操)의 무덤에서 세계 최고로 추정되는 백자항아리가 출토됐다. 이로써 백자 출토역사를 300년 이상 소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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