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3일 아주장터…"대한독립만세∼ 만세∼ "
1919년 4월3일 아주장터…"대한독립만세∼ 만세∼ "
  • 거제신문
  • 승인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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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신문 창간30주년 특집】 3.1 만세운동 100주년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며 민족의 쌓인 한이 폭발한 '3.1 독립만세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100년 전 선열들의 피맺힌 외침이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이때 거제에서도 아주장터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잇따랐다. 창간30주년을 기념해 거제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에 대해 알아보고 애국애족정신과 거제인의 기질을 되새기기 위해 3.1운동 100주년 기획시리즈를 지면에 게재한다. 그 첫 번째로 향토사학자이자 서울대 객원연구원인 전갑생 연구원의 논문을 인용해 '아주장터의 3.1운동과 윤일의 등장' 편을 싣는다. 이어 거제의 만세운동과 3.1운동 100주년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등을 고찰하며 지역에서 계획하고 진행 중인 각종 일들을 찾아 연속 보도할 계획이다.  편집자 주


1919년 3월1일을 기해 들불처럼 번져나간 대한독립만세운동. 사진은 거제 만세운동의 신호탄이 된 아주장터가 있는 아주동 전경.
1919년 3월1일을 기해 들불처럼 번져나간 대한독립만세운동. 사진은 거제 만세운동의 신호탄이 된 아주장터가 있는 아주동 전경.

아주장터 만세운동과 윤일 등장

1900년대 초 거제시 이운면은 거제지역 청년운동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연초면과 거제면을 잇는 길목이자 교통요충지며, 또 거제 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다. 이운면은 현재의 일운지역과 장승포·아주·옥포지역을 말한다.

여기서 윤택근(이명 윤일)을 중심으로 한 지역 청년들은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이운면 아주·아양리 중심에 위치한 '하아시장'(통칭 아주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의 전개 양상과 주요 참여 인물들을 분석한다.

거제의 만세운동은 1919년 4월3일 이운면 아주장터에서 시작됐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독립만세시위를 모의한 윤택근(尹澤根)은 이주근(李柱勤)·이인수(李麟洙)·이공수(李恭洙) 등과 거사를 결의했다.

4월1일 이운면 아양리 서당에 모인 윤택근 등은 종이 10여 매에 '대한제국독립만세(大韓帝國獨立萬歲)'라고 크게 쓴 격문을 만들었다. 4월2일 시위 주모자들은 아주리 이선이(李仙伊) 집에 모여 회합했다. 회합 후 이인수는 이중수(李仲洙)와 함께 격문을 눈에 잘띄는 인가의 대문에 붙이거나 아주장터 길 위에 뿌렸다.

4월3일은 아주리 장날이었는데, 윤택근·이주근·이인수·이중수 등은 오후 7시30분경 장터에 모인 이운면과 연초면 주민 2500여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통영지역 헌병분견소와 송진포 해군방비대, 가조도 해군경비대 등으로부터 헌병과 경찰들이 출동해 시위를 진압했다.

이날 시위로 윤택근·이인수·이주근 등이 체포돼 윤택근은 징역 1년, 이인수와 이주근은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 주종찬(朱宗讚·1893~1933)은 4월3일 옥포교회 교인들과 함께 아주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4월6일 이운면 옥포리 망덕봉 앞에서 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옥포를 출발해 10리 거리의 아주시장터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 행진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민중들은 아양리 소재 이운면사무소를 점거했다.

만세운동 주모자로 검거된 윤택근·이주근 등이다.
만세운동 주모자로 검거된 윤택근·이주근 등이다.

윤일은 1891년(호적 1892년생) 거제군 연초면 명동리 202번지에서 윤영두(尹永斗)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훗날 윤규찬(尹奎贊)의 서자로 입적한다. 그의 나이 5세 때 거제군 이운면 아주리 288번지로 이사했다가 1923~1925년 사이 경성 팔판동에서 자녀 2명을 낳았다.

1927년 7월 김해군 저리로 이주, 1943년 원산시 두산리에서 거주하면서 막내딸 정련을 호적에 올렸다. 아마 그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출감 후 계속 원산 또는 함흥에서 거주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큰형은 윤한근(尹翰根·1890년생)이다.

이도선(李道善)은 이주목(장남)·이중환(李仲煥)·이동해(李東海) 삼형제를 뒀으며 거제 아양리 출신으로 서당 접장을 했다. 주목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연초면 천곡리로 이주했다. 주목(장남 이명(李赤))은 천곡리 하천에 사재를 털어 보명강습회(普明講習會)를 창설했다. 둘째 중환은 일찍 사망했다. 셋째 동해는 주목과 함께 이운소년회에서 활동했다.

아주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아양리 뒷산 당등산(堂嶝山)의 당등산성(지금의 아주당)에서 시작해 아주시장으로 내려왔다. 거제지역의 헌병파견소는 4개소에 있었는데, 거제면의 거제(거제·사등·둔덕면 관할)·장승포(이운·연초면)·송진포(장목·하청면)·구조라(일운면)·저구미(동부면) 등이었다 

거제지역의 3·1운동은 <표①>에서 보듯이 4월3일과 6일 2회에 걸쳐 일어났고, 윤일·주종찬 등 총 21명이 검거돼 4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표①>에서 주목되는 점은 옥포 지역보다 아주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주지역이 이운면사무소의 소재지이자 장터가 위치해 정치·사회적 중심지임을 보여준다. 구속자는 옥포보다 아주지역이 2명 더 많았다.

또한 윤사인·이중수 등은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8월을 받았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반면 윤일·이인수·이주근은 1심에서 기소유예였으나 징역 1년과 징역 8월을 각각 선고받아 법정 구속되고 말았다.

여기서 거제지역 3·1운동의 몇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주요 인물들은 친인척 관계라는 점이다. 윤일은 주종찬과 사돈관계이며 윤사인과 사촌이다. 주종찬은 주금주(朱今柱·1865년생·본관 신안)의 셋째 아들이며, 모친 윤해선(尹海善·1861년생)은 윤일과 동향이자 사촌관계다. 주종찬의 형 형찬(亨贊·1874년생)은 옥포교회의 장로이자 진정률과 사돈관계다.

또한 윤일은 1906년 부인 옥우수(玉又守·1880년생·옥정환의 장녀)와 혼인해 아주의 옥영준(1892~1957)과 사돈 관계를 맺는다. 윤일의 장남 병규(1916년생)는 연초면 천곡리 출신인 연초청년회 간부였던 옥상동(玉相東)의 장녀 덕윤(1917년생)과 혼인해 사돈 관계를 형성한다. 옥상동의 동생 옥상목은 연초청년회장을 지냈고 윤일과 동향동년배인 이주수(1891년생·연초면 천곡리 출신)와 사돈 관계다. 윤일은 이주목과 연초면 천곡리 서당에서 같이 한문수학을 했으며 보명강습회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운청년회의 핵심인물 신정권은 윤일이 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함흥에서 함께 거주하고 훗날 한국전쟁 때 그의 자녀들을 돌봐줬다. 이인수·이주근·이중수·이태수·이공수·이선이는 아주리 '전주이씨 부자집'의 형제들이다. 옥포지역 3·1운동 출신자들은 김해김씨 김종윤(1896년생·김일의 손자·한문수학·숭선전참봉·동몽교관·옥포리 거주)과 김종혁(1873년생·한문수학·홍릉참봉·장승포리 거주) 형제의 자손들이다. 옥포리 운동자 중 김기두·김사룡·김환·김선주 등은 김종윤·김종혁의 아들이다.

이처럼 3·1운동 참여자들은 거제지역의 명문가 또는 양반가문인 칠원 윤씨·전주 이씨·남원 양씨·신안 주씨·의령 옥씨 등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옥포 지역 3·1운동에 참여한 진홍기·진정률 등은 청년운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또 거제지역 3·1운동 주도자 윤일과 '이씨 부자집 아들들'은 거제지역의 양반 가문이며 전부 연초면 천곡, 이운면 아양 서당, 아주의 명호제(明湖齋)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주종찬은 옥포리 서당에서 수학하고 주금주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됐다. 주종찬과 함께 김이두 등 옥포리 김씨들은 한문서당 출신이자 유학자 집안이었다.

윤일의 장녀 봉금은 1936년에 함흥부 성천정의 이순익과 결혼했다. 이 부자집은 이종효(판윤)·이홍수(동몽교관)·이종찬 삼형제가 있었다. 이종효의 아들은 이희수(1878년생·아주 노거리 거주·장능참봉·동몽교관), 이공수 등이다. 이홍수의 아들은 이정(1892년생)과 이주근이다. 이종찬의 아들은 이도수(1893년생·아주리 거주·한문수학)·이인수·이중수·이태수 등 사형제를 뒀다.

2회에 걸쳐 전개된 거제의 3·1운동은 아주 명호재와 옥포 한문서당 학생들과 옥포교회의 교인들도 동참하고 있었다.

윤일을 비롯한 아양·아주 출신자들은 1920년 이후 이운면을 중심으로 거제지역 청년·노농·문화운동을 전개했다. 다만 주종찬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더이상 운동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 외 진정률·진홍기 등도 윤일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거제지역의 3·1운동은 통영·고성지역과 연합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지 않았고 타 지역의 인물도 참여하지 않았다. 행정 구역상 통영군에 속한 거제는 3·1운동에서 독자적인 형태를 띠었다. 통영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3·18·28일, 4월2일 등 4회에 걸쳐 전개됐으나 거제지역의 출신자들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거제와 통영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매일 거제∼통영 간 도선이 운행하고 있었지만 두 지역의 3·1운동 주도자나 참여자들 가운데 연합운동이나 인적교류를 찾아볼 수는 없다. 통영지역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는 운동이었던 것에 반해 거제는 일부 기독교인 세력도 참여했으나 윤택근을 중심으로 하는 비기독교인들이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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