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여자포로가 탈출을 하다가 유엔군 감시병에게 들켜 철조망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여자 포로수용소는 수월과 해명마을 사이 주작골 입구에 350여명의 포로가 수용돼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들로 구성된 여성들로 서울에서는 남로당 지하조직 여성동맹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한 여성들이다. 

예전 1971년 6월25일 수월지구 제산마을 위쪽에 살고있던 여자포로를 만났었다. 보통 키에 아름다운 모습이었던 그는 포로란 사실도 감추고 만나기를 꺼려했다. 여러번 시도 끝에 겨우 만난 그는 이옥희씨로 평양 출신이었다. 그에게서 여자포로수용소에 대한 내용을 듣게 됐다.

여자 포로수용소에 있는 여자는 대부분 이남 출신이고,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대학 재학 중인 여자들로, 가족관계와 출신지에 대해서는 말을 회피하고 이름도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말하는 말투와 이야기를 듣고 고향이 어디며, 살아왔던 생활환경을 대략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옥희씨는 남조선 여성동맹을 조직할 때 조직원으로 남하해 선전요원으로 있다가 포로가 돼 부산 거제리 수용소에서 거제도로 옮겨 왔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남한에 남고 싶었다. 어느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장사를 하던 함경도 피난민을 만났는데 그 사람에게 탈출에 대한 의사를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며칠 뒤 민간복을 철조망 사이로 건내 받고 탈출 작전을 짰다. 피난민 장사꾼이 초소 안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사라며 보초의 정신을 빼앗을 때 몰래 나와서 철조망 가에서 장사하는 피난민 여자행세를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포로가 아닌 피난민 장사꾼으로 변해 지내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된 사람과 동거를 했다고 했었다. 몇년 후 찾아갔더니 모르는 사람처럼 정색을 하면서 다시는 못 오게 해서 말도 붙이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될 것을 두려워해 광주 쪽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전쟁은 비운의 역사를 만든다. 하루속히 고향과 부모를 잃은 동포들이 자유를 찾는 통일이 되기를 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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