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기어코 꽃이 지고 잎 떨어지니 겨울이 왔나보다. 모든 사람의 붉은 심장 같았던 가을은 산과 들, 세상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나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산과 들은 흐르는 것에 서두르지 않지만 사람들은 꼭 계절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마음 끝에 아슬아슬한 세월을 안타까워하고 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가을을 향해 '훌쩍 떠나니 그대 쓸쓸하지 아니한가?' 물으며 자신에게 소리쳤을까? 대답은 쉽게 되돌아오지 않았을 것이고 질문들만 가득한 골목길을 홀로 걷다가 엷고 겹겹이 쌓이는 가로수 불빛에 제 몸의 그림자를 그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컴컴한 골목을 벗어나 제법 시끌시끌한 소주방에 제 그림자를 놓이고는 온기에 쪼그라드는 자신의 심장을 아무에게나 내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하루 종일 친구와 수다를 떨다 문득 사람이 옆에 있어도 외로울 때, 그 외로움이 나약해지는 자신과 흐르는 세월이 주는 것이라면 더더욱 집착하고 싶어지는 멈춤의 순간이 있다. 그 멈춤의 순간은 늙는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자신이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가을과 겨울 그 사이만큼 확실한 표징을 주는 계절이 또 있을까 싶다. 나에게 나이를 알려 주는 것, 그래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자연은 참 쉽게도 알려준다. 서두르는 법도 없이 말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여 보지만 자연은 아무 말이 없고 다급하게 원하는 대답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다만 해가 뜨고 지는 동안, 또 우리가 밤마다 세월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나이를 더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에 대한 집착과 늙음에 대한 변명만 무성한 체 말이다.

그런 세월의 흐름 속에 하루하루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험악한 사건사고가 터지고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에 마치 혼자 내버려진 것처럼 불안하고 외로울 때가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모르는 사람을 폭행해 죽게 만든다던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아름다운 자연을 파 헤쳐 개발한다던가, 또 그 개발에 힘을 보태고 이권을 챙겼다던가,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고 모은 성금을 유흥비로 써버린 자선단체의 누구라던가, 자기편이 아니라고 멀쩡한 사람을 직장에서 함부로 내 쫓아버린 비정한 단체의 장이라던가, 법과 정의를 함부로 갉아먹은 몰염치한 나랏일 하는 지체 높은 분들이라던가, 자신의 사랑이 아닐 바에야 때려 죽여도 좋다는 그 무슨 데이트 폭력이라던가, 어선 폐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의 뱃속에서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이 나왔다던가, 배고픈 북극곰이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하여 뜯고 있는 장면이던가, 쓰레기들로 가득 찬 아름다웠던 섬이 점점 썩어가고 있다던가. 너무나 외롭고 불안하여 계절 바뀌는 것까지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자연은 아직까지도 말이 없고 성급하지 않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완전히 멀어져 가는 가을과 겨울 사이.

세월에 집착하며 늙어가는 인간들을 위해 온전하고 순수한 세상의 생명에 집착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늙어가는 외로운 사람, 자신을 위해 자연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변명 하나쯤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순한 세상을 위해 왜 나는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변명 하나쯤 할 수 있어야 양심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세상은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급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을 대신해 자연은 우리가 끝까지 알아차리도록 충분한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둘러보면 모두가 외롭고 나약한 인간들의 이기적 집착과 거짓된 변명만 가득한 세월이다. 세월의 흐름이 즐거워지도록 가을과 겨울 사이의 온기가 외롭지 않도록 자연과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다. 옆 사람의 아픈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줄 때다. 결국 사람은 사람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흐르는 세월에만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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