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옥 계룡수필문학회원

▲ 박종옥 계룡수필문학회원

“난 이 곳이 싫어.” 

  “왜?”   

“시시해. 늘 똑같은 얼굴들, 변하지 않은 풍경들이 지겨워. 새로운 세상으로 가고 싶어. 화려한 것이 아주 많은 곳에 딱 하루만이라도 살아봤으면 좋겠어.”

태어나서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농원 생활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나른한 오후다. 햇볕에 수면제를 탔는지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그때 아저씨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저씨는 매일 우리를 둘러보고 아픈 데는 없는지, 벌레가 먹지는 않았는지 꼼꼼하게 살핀다.

아저씨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린다. 아저씨에게 잘 보여 새로운 세상으로 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는 힘껏 동백나무 가지 위에 팔을 뻗었다. 그것도 모자라 동백나무 뿌리 위까지 점령해 물을 깡그리 뺏어오기도 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해도 동백나무는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먹구름이 두껍게 산허리를 감싸더니 쌀가루 같은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부서지던 여름날, 드디어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은행나무야, 넌 도시로 가게 됐구나. 녀석, 정들었는데 아쉽구나.”

아저씨는 날 어루만지더니 내 곁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신이 나서 동백나무를 쳐다봤다. 동백나무는 어두운 얼굴로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굴착기가 와서 내 뿌리를 팠다. 인부들은 잔뿌리를 자르고, 굵은 뿌리는 튼튼한 검은 고무줄로 꽉 동여맸다. 잔뜩 욕심을 부려 키운 뿌리가 싹둑 잘라질 때 무척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깟 고통쯤은 참을 수 있다.

화려한 세상으로 갈 수만 있다면. 한참을 달리던 트럭은 도심 한복판에 나를 내려놨다. 수많은 차, 수많은 사람이 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고층 빌딩들은 하늘을 찌를 듯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인부들은 내가 심어질 구덩이를 팠다. 뿌리를 사정없이 묶었던 굵은 고무줄이 풀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후련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부들은 굵은 고무줄을 풀지도 않고 그대로 나를 구덩이 속에 집어넣었다. 뿌리를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렸다.

도시의 밤은 꼭 마술 상자 같다. 빈 상자에서 자꾸만 비둘기가 빠져나오는 것처럼, 화려한 옷차림의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도시의 거리로 흘러들어왔다. 어디서 저렇게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오는지 신기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밤이 되자 도시의 나무들은 모두 화려한 불빛을 발했다. 은근히 옆 나무들이 부러웠다.

불야성 같은 도시의 밤거리를 구경하느라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몸이 나른하고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옆 나무에 아침인사를 했다.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오후가 되자 어제 온 인부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주렁주렁 뭔가를 내 가지 위에 걸었다. ‘맞다! 어제 옆 나무들 위에서 반짝거렸던 요술구슬이구나.’ 가슴이 떨렸다. 나에게도 드디어 멋진 요술구슬이 걸쳐지는 거다.

드디어 밤이 왔다. 내 가지에서도 반짝거리는 요술구슬이 빛나기 시작했다.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이 날 보며 환호성을 쳤다. 사람들은 다른 나무들을 뒤로 한 채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밑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우쭐거리며 옆 나무들을 쳐다봤다. 여전히 녀석들의 표정은 시무룩하고 어두웠다.

이곳에 온 지 한 달째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내 곁을 지나갔다. 때로는 다정한 연인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내 몸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새벽이면 술 취한 사람들이 세상을 한탄하면서 날 발로 차기도 했다.

강철이라도 녹일 듯 뜨거운 여름날이 계속되고 있다. 갈증이 났다. 이 곳에 온 후 단 한 번도 비가 오지 않았다. 꽉 조여진 뿌리 때문에 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찾은 물줄기도 옆 나무뿌리가 잽싸게 뺏어가고 말았다.

밤이 되면 가지에서 반짝거리는 유리보석 때문에 뜨겁고 따가웠다. 밤이 돼도 납작 엎드려 아스팔트를 질주하는 요란한 자동차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들의 고함은 낮에 뱉어놓은 많은 사람의 소음보다 컸다.

깜빡이는 네온사인의 불빛들은 아귀처럼 서로 아우성 댔다. 비대해진 도시의 소음과 낮보다 환한 도시의 불빛 때문에 매일 불면증에 시달렸다. 난 서서히 말라갔다. 흙탕물처럼 잔뜩 흐려있던 어제였다.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앓아오던 내 옆의 깡마른 나무가 파헤쳐져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갔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은행나무도 오래 가지 못하겠는 걸. 벌써부터 조짐이 보여. 저 잎 좀 봐. 낙엽처럼 노랗게 탈색되고 있어.”
“며칠 있다 농원에 다시 들러봐야겠어. 하긴 이런 환경에서 견디는 놈이 신기한 거지.”

저번에 왔던 인부들이 날 보며 한마디씩 했다. 그들의 말이 연기처럼 퍼졌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날 보며 항상 웃어주던 동백나무의 해사한 미소와 벌레를 잡아주던 아저씨의 따뜻한 손길이 떠올랐다.

은빛 가루 같은 햇볕이 쏟아져 보석처럼 빛나던 농원의 아침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밤이 되면 먹물처럼 어둠이 내려와 세상을 잠들게 했던 농원의 조용한 밤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꼭 한 번만.’
흐린 도시의 아침 때문인지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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