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도 촬영한 장승포 항구다. 당시 아늑한 항구마을로 초가집과 함석집·기와집이 있었다. 마을 앞 항구로 차가 겨우 다닐 정도의 길이 나 있고, 집 주변에는 텃밭이 있다. 아늑한 시골의 바닷가 마을이다.

장승포로 이름 한 것은 해성고등학교 올라가는 도로 중간에 고목나무가 있다. 이 나무 아래 예전에 장승이 서 있었다. 장승이 서 있는 곳이라 해서장승거리라 했다. 이 장승거리가 장승포가 됐다.
1889년 한일 통어조약이 된 후 일본이 우리나라에 고기잡이로 올 수 있었다. 1906년 태전종차랑(太田種次浪)이 입주해 입좌촌이라 했다. 그 후 향추원태랑(香椎源太郞)은 진해만과 거제도 근해의 이왕가(李王家)의 좋은 어장을 차용이라는 형식으로 독점했다.

이것이 황태 어장이라 한 것이다. 그때 입좌촌은 234호에, 1893여명의 일본인이 살았다. 그중 어민이 73호, 상인이 37세대였다. 성어기(盛漁期)에는 건착망(巾着網) 박망(縛輞) 100어통, 어선 500척, 종업원 4500명, 운반선 290척이나 됐다. 1930년(昭和 5) 장승포 방파제가 완성됐다. 그 당시의 방파제와 등대가 그대로 잘 남아있다.

1935년 9월27일 이운면을 장승포 읍으로 승격해 아양리에 있던 사무실을 장승포로 옮겼다. 일본인이 장승포에 정착한 것은 그 당시 장승포항 주변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서 일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해 일본인촌이 됐다고 한다. 이 사진의 집들도 대부분 당시 일본인들이 살던 집들이라고 한다. 1980년까지만 해도 장승포 신사터 아래는 일본인 거리인 이층집들이 남아 있었다.

장승포가 급진적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흥남 피난민들이 이곳에 오고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1년 1월4일 6·25전쟁의 두 번째 서울 후퇴(後退)로 남하시킨 서울 장정(壯丁) 1만명의 제3훈련소를 설치했고, 북한 피난민 15만 명을 구호하는 보건사회부 거제도분실과 통영군 거제도분소, CAC거제도 팀을 창설해 전시의 후방기지가 되고 부터다.

1973년 아주 아양지역에 대우조선소가 설치되면서 장승포가 급진적으로 발전이 되면서 1989년 1월1일  장승포시로 승격했다. 이후 1995년 1월1일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통합해 거제시가 장승포동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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