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출세의 등용문이던 과거시험은 고려 때부터 부정행위로 골치를 앓았다. 오죽하면 시험문제 유출을 막기 위해 과거날 새벽에 시험관들이 모여 문제를 의논했다.

응시자는 과거장에 들어 갈 때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 당했고, 만일 책이나 메모된 컨닝페이퍼라도 발견되면 길게는 6년 동안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이를 묵인한 관리도 처벌을 받았다. 시험에 쓸 종이는 개인별로 준비해야 했다. 따라서 입장할 때 관리가 개인 종이에 도장을 찍어줬다. 그러나 권세가나 부잣집 자제는 질 좋은 종이를 썼기 때문에 답안지만 봐도 신분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채점관이 응시자의 신분을 알 수 없도록 봉미(封彌 또는 봉명)를 했다. 봉미는 답안지의 오른쪽 끝에 이름이나 본관 등을 적고 접어서 풀로 붙이는 것을 말한다. 채점을 하고 나서 봉미를 개방해야 하지만 시험관이 미리 떼보고 채점하는 폐단이 생기자 역서(易書)로 바꾸었다. 역서는 시험 답안지를 거둔 다음, 피봉된 봉미는 떼어 내어 따로 보관하고, 답지는 서리로 하여금 다시 쓰게 해서 고시관에게 제출하는 방법으로 응시자와 고시관의 결탁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 또한 세도가에서는 역서할 때 서리로 하여금 시권을 고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깊어만 가는 과거의 부정행위 때문에 강력한 처벌규정을 만들기도 했다. 세종29년에는 과거 부정행위자는 곤장 100대와 도형(徒刑) 3년을 집행하고 영구히 등용하지 못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근절되기는커녕 더해만 갔다. 조선 후기에 오면 과거시험의 부정은 고질이 될 만큼 만연했다. 가장 많이 행해진 부정은 남의 글을 베껴 쓰거나 남이 대신 글을 지어 써주는 '차술차작(借述借作)'과, 시험관이 응시자에게 문제를 미리 가르쳐주어 응시자로 하여금 답안을 미리 알게 하는 '혁제공행(赫蹄公行)'이었다.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 다니는 두 딸에게 시험 문제를 유출한 의혹을 받고 있는 숙명여고 전직 교무부장의 행위가 조선시대였다면 바로 혁제공행의 부정행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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