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거제신문 서울지사장
김철수 거제신문 서울지사장

'송백장청(松柏長靑)'. 소나무와 잣나무는 오래도록 푸르다는 말이다. 몇 년 전에 별세한 어느 국가 원로의 2010년 휘호다. 지금 시기는 '송백장청'의 위기인가 한다.

이 휘호는 2005년 '서울 서예비엔날레'에 출품한 서예 작품이다. 그는 평소 이 문구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이 2010년 6월 정부 세종로청사 로비와 독도 영상 모니터 옆에 전시됐다. 휘호 밑에는 별도의 설명이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오래도록 푸르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맹형규 장관의 요청으로 행정안전부 공무원들에게 하사 하신 휘호임. 공직자들이 국민이 원하는 자리에서 늘 한결 같고 청렴한 자세로 국민을 향한 봉사에 정진하길 바라는 국가 원로의 마음이 담겨 있음.'

사시사철 푸름을 자랑하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오래전 우리 조상들로 부터 굳은 절개를 상징해 추앙받아온 나무다. 쳐다만 보고 있어도 힘이 솟는 나무다. 이 나무가 지금은 멸종위기에 직면해 있다. 재선충병의 침범 때문이다.

1988년 부산 금정산에서 처음 발생한 재선충병에 소나무가 감염되면서 매년 피해면적이 늘어났다. 차츰 남쪽에서 북쪽으로 침입해 온다. 침입의 방법도 독하다. 재선충병에 감염된 후 증상이 나타나기까지의 잠복기간 동안에 반출된 나무도 감염원이 된다. 제재된 형태로 유통된 목재로도 감염이 된다니 방제가 더욱 어렵다. 군락지에서 누렇게 변한 소나무가 전기 톱날에 속수무책으로 난도질돼 사라지고 있다.

재선충은 크기가 1㎜ 내외의 실 같은 선충이다. 매개충인 솔수염하늘소·북방수염하늘소의 몸 안에서 서식한다. 이 벌레들이 소나무·잣나무 등의 새순을 갉아 먹을 때, 상처부위를 통해 침입한다. 침입한 후로는 빠르게 증식해 수분·양분의 이동통로를 막아 나무를 죽게 한다. 이 병에 감염되면 치료약이 없어 100% 고사한다. 이 병의 증세는 재선충이 침입한 6일 째부터 잎이 처진다. 20일이 되면 잎이 시들기 시작한다. 30일 후 급속하게 붉은 색으로 변하며 나무전체가 고사(枯死)한다. 소나무·잣나무에 치명적으로 심각한 해충이어서 오죽하면 '소나무 에이즈'란 별명이 붙었으랴. 재선충의 확산 속도가 계속된다면 멀지 않아 소나무와 잣나무는 멸종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이다.

고향 바닷가, 곰솔의 감염 현장을 지나다 차를 세웠다. 안타깝다. 곰솔의 타들어가는 신음소리가 마음을 후볐다. 애처롭기 그지 없었다. 수십 년을 자란 낙락장송(落落長松) 숲 사이로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아름다운 해안이 펼쳐졌다. 솔향기가 세속에 찌던 가슴을 활짝 열어주곤 했다.

그런데 늠름한 기상과 푸름은 차츰 사라지고 타버린 소나무는 속절없이 잘려나간다. 투명한 수액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염분이, 폭풍에 날려 휘몰아 쳐 와도 끄떡없이 버텨왔는데 병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감염된 소나무는 베어내고, 매개충 방제를 위해서 베어낸 소나무의 그루터기에 비닐 덮개를 해서 재선충의 확산을 막는 방법 밖에는 도리가 없다든가. 방제가 최선의 수단이란다. 치료약이 없는 혹독한 병이 우리의 산야를 휩쓸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송백장청'에 외우내환(外憂內患)이 겹쳐서 위기다. 그 하나는 '소나무 재선충병'의 급격한 침입에 걱정이다. 그 둘은 공직자들의 자세가 '송백장청'의 휘호가 무색하다. 작금에 인구에 회자되는 공직자들의 자세가 수상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직자들의 장청(長靑)을 장담할 수 있으랴. 국민의 공복(公僕)이 돼 달라던 원로의 휘호를 잊었는가.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할 사례가 종종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생태계를 교란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재선충병'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청이 쉽지는 않다는 얘기리라. 공직자의 국가관, 가치관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지 변함없이 푸른 기상으로 살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한 편으로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푸른 소나무에 '재선충병'이 침범해 올지라도, 건강한 소나무가 아직도 우리의 산야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지 않은가.

위기일수록 장청한 기상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재선충병'에 감염되지 않은 송백(松柏)의 지조(志操)를 어찌 가벼이 여기랴. '재선충병'에 굴하지 않고, 감염되지 않은 송백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바른 자세로 '송백장청'을 지키려는 푸른 다수가 버티고 있지 않은가.

'송백장청'의 휘호 아래에서 그 분과 찍은 기념사진을 새삼 꺼내 들고 '송백장청'의 깊은 뜻을 되새겨본다. 올 여름 혹독한 폭염을 어느새 날려 보내버린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송백장청의 솔향기가 차츰 온 누리를 휘감고 있으니 좋은 세월을 기대해볼 만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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