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중국의 문자를 버리고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오랑캐나 할 짓입니다." 세종께서 '우리말이 중국글자와는 서로 달라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노라'고 말하자 신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 반대의 선봉에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가 있었다. 최만리는 어떤 사람인가? 조선 초기 유교주의 국가 정립에 토대를 마련한 학문연구기관 집현전 출신이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로 1년 나가있었던 것 말고는 그의 관직생활 25년간을 집현전에서만 오로지 근무해 부제학까지 오른 사람이다.

최만리에 대한 세종의 사랑은 각별했다. 최만리는 소문난 주당이었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최만리를 걱정해 세종은 "경은 몸을 생각해 앞으로 술을 세 잔 이상 마시지 마시오" 하고 명령했다.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최만리는 자신이 쓸 술잔을 스스로 크게 만들어 하루 세 잔씩만 마셨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세종은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모두 옥에 가뒀다가 다음날 풀어준다. 옥에서 풀려난 최만리는 부제학의 자리를 집어던지고 낙향한다. 세종은 그 자리를 비워둔 채 최만리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최만리는 이듬해 죽고 만다. 훗날 최만리는 청백리로 이름이 오른다.

그런데 우리말에 적합한 문자를 만든다면 모두가 좋아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목숨을 건 상소문으로 한글창제에 반대했을까? 그건 문자를 독점하려는 양반들의 기득권 때문이었다. 훈민정음은 똑똑한 사람이라면 반나절이면 익힐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깨칠 수 있는 글자이니, 백성들이 글자를 아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문자의 독점은 곧, 정보의 독점이다. 서양의 종교개혁도 라틴어를 아는 사제들만이 성경을 읽고 해석했기 때문에 종교를 독점하고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누구나 읽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정보를 독점하면 권력이 생긴다. 권력에 빠지면 정보의 철책은 더 두터워진다. 정치가의 말로는 바로 정보의 독점 때문에 사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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