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성장기의 많은 부분을 '놀이'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이 잠깐 있었다. 국가의 산업이 성장기를 보이기 시작할 무렵 학원에 갈 필요도 없던 시절이었고 숨바꼭질·돌차기·썰매타기·구슬치기·전쟁놀이·고무줄놀이 등 학교에서 집까지 오고가는 모든 공간이 진득하게 놀 수 있는 장소였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놀이가 곧 지능을 발달시키고 창의성과 사회성을 일깨워주는 훌륭한 교과서가 됐다. 코피가 터지는 싸움판이 종종 벌어졌지만, 고발·고소까지 가는 경우는 없었고 질서가 되기도 했으며 우정으로 쌓이기도 했다. 모든 질서가 자유롭거나 편하지는 않았지만, 공동체를 깨거나 내일의 놀이를 함께 할 수 없는 간극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공동체의 규범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서로가 등을 보이는 상황까지 가서는 안 되는 것이며, 참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까지 놀이를 통해서 가르쳐져 왔던 것이다.

모든 유년시절이 즐겁고 자유로운 '놀이'만 있었던 유복한 세대는 아니었을지라도 적어도 지금의 자녀들이 겪는 성적과 능력을 요구하는 강압은 없었다. 그 시절의 누구한테나 가서 물어보라. 고무줄놀이에 불렀던 노래가 무엇인지, 살금살금 다가가 훼방놨던 고무줄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십중팔구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아이처럼 재잘거릴 것이다.

하지만 '놀이'를 많이, 자유롭게 즐겼던 세대라 해서 엄청난 실적이나 업적을 이뤄냈다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의 눈에는 시간을 낭비하는 헛한 것이며 밥 때와 숙제를 자주 놓치는 무용한 것이었으리라. 일을 않고 놀고만 먹을 수는 없기에 말이다. 

실질적 보상도 없고 엉뚱하고 헛된 것처럼 보이는 '놀이'는 '일'과 반대되는 것이며 생산과는 거리가 먼 낭비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일'은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했다. 국민의 4대 의무에 들만큼 '근로의 의무'는 중대한 것이다.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지만 그것 하나의 사실만으로 충분히 세상은 슬프고 괴로울 수 있다. 놀이는 진지하지 않아도 되고 대단한 실적을 보여주지 않아도 유쾌할 수가 있고 쾌감을 얻을 수 있지만, '일'은 고통이 따를 수 있고 강제성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마냥 유쾌할 수는 없다. 

'일'과는 반대로 '놀이'의 세상 안에서는 보상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실없고 쓸 데 없는 행위나 말을 하는 사람을 두고 '놀고 자빠졌네'라는 속어로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가 보상이 있어야 되고 실질적인 업적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질 않는가. 경쟁을 통한 너무 많은 실적과 업적이 필요한 세상은 도저히 놀 틈을 주지 않는다.

취업하기 힘든 청년들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모든 세상이 아니 모든 인류가 이제 좀 천천히 걸어가도 되지 않겠는가. 완전히 '일'을 접어두고 하는 '놀이'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자기방치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잠시 일과 현실이 주는 억압을 끊어버리고 '놀이'의 가치와 진실성을 되찾아 갔으면 한다. 놀기가 어렵고 눈치 보인다면 짧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할 수 있는 놀이, 가령 점심시간 5분 전 구성원들끼리 점심메뉴 정하기 '가위바위보' 게임이나 한 사람 10분 먼저 퇴근시키기 '사다리타기'는 어떤가. 아니면 구석에 다트 게임판을 설치해놓고 '커피타기'는 짧지만 즐거운 놀이가 되겠다.

우리의 유년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어울리던 '놀이'에는 법 조항처럼 깨알같이 적힌 복잡한 내용은 없었지만 동네 형이나 누나들로부터 이어받는 놀이의 방법에서 자연스럽게 질서와 규범을 알아가고, 큰 훈계나 질책이 없어도 너무나도 당연한 듯 규범을 즐겁고 자연스럽게 알아채는 시절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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