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광 칼럼위원
김미광 칼럼위원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작품 중에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이라는 작품이 있다. 박완서 선생의 작품을 좋아하는 터라 대학시절 이 단편 소설을 접했을 때 그 구수하면서도 직설적인 필력에 반해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주인공 성남댁은 중풍이 걸린 나이든 영감을 수발하는 조건으로 13평 남짓한 아파트를 받기로 영감의 며느리인 진태 엄마로부터 약속을 받았다. 노년에 효자 노릇을 단단히 할 아파트를 생각하며 성남댁은 3년을 성심성의껏 영감 수발을 했는데 어느 날 중풍이 심해진 영감님이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부터 성남댁은 뒤로 밀려나고 집안 체면을 빌미로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다.

설상가상 성남댁이 받기로 한 13평 아파트는 이미 진태네가 살림을 합칠 때 팔아치웠다는 것을 문상을 와서 갖은 수다를 떨고 있는 진태엄마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됐다. 진태엄마는 아파트를 이미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성남댁에게 알리지 않고 계속 아파트를 미끼로 성남댁을 부려먹은 것이다. 아파트를 주겠다는 구두 약속은 성남댁과 진태엄마 둘 만이 아는 은밀한 거래였기 때문에 성남댁은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없어 분노하지만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거쳐서 인간에게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요즘 말로 긍정의 아이콘인 성남댁은 그동안 영감이 틈틈이 챙겨준 목돈을 복대에 차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장을 빠져 나오면서 속으로 한마디 내뱉는다.

'사람이 분수를 모르면 죄를 받는다니까. 그렇지만 아파트 한 채는 지 알고 내 알고, 하늘까지 아는 일이건만,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여 넘길 수가 있담. 천벌을 받을 년.'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해 병든 영감의 병수발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자신이 처한 입장과 분수를 알고 생명의 윤리성을 아는 하류층 노(老) 여인의 직설적인 표현을 빌어 사회 중산층의 이중성과 세속성을 담담하지만 속시원하게 그려내, 마치 짧고 깔끔한 단편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는 것이 내가 그 소설을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이었다.

요즘 뉴스 매체에서는 연일 유명 정치인·시인 등의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성추행을 했다, 안했다, 연인이었다, 무슨 소리냐 아니다 등. 나는 정치에 관심이 '1'도 없고, 시(詩)의 'ㅅ'자도 모르므로 어떤 결론이 나든지 간에 상관없다. 뭐가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내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관심두는 것조차도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신문이든 뉴스든 보는 곳마다 그 소식이 실려 있으니 저절로 알게 되고, 급기야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조금 궁금해질 때도 있다. 누가 엄청난 거짓과 위선으로 자기와 전 국민을 속여 짧은 인생 더럽게 한번 살아보자고 결심해서 법정까지 갔는지, 이런 추한 인생들에 결코 관심을 두지 않으리라 결심한 며칠 전 또다시 뉴스 헤드라인에 오른 소식에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읽은 것이 3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왜 갑자기 이런 뉴스를 접할 때 소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이라는 말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비록 오래전에 읽었지만 박완서 선생의 평범하면서도 진득하게 사람의 내면의 생각과 위선을 시원하게 그려내는 문체를 너무도 재미있게 읽어서인 것 같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이라 두 사람만이 알고 둘 중의 하나는 어떤 이유에서든 거짓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에이브라함 링컨의 말마따나 '몇 사람은 평생 속일 수 있고, 얼마간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모든 사람을 평생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즘 뉴스를 장식한 사람들 중에 누군가 억울한 사람은 분명 박완서 선생 소설 속 성남댁 같은 말을 되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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