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인터뷰】 6.25 참전용사 최종겸 어르신
결코 잊어서는 안될 고귀한 희생…호국영웅

6.25 전쟁일을 3일 앞둔 지난 22일 참전용사 최병안(89·사진 맨 왼쪽)·최종겸(91·사진 가운데)·박동식(90) 어르신들이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전쟁 당시를 얘기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6.25 전쟁일을 3일 앞둔 지난 22일 참전용사 최병안(89·사진 맨 왼쪽)·최종겸(91·사진 가운데)·박동식(90) 어르신들이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전쟁 당시를 얘기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가르침이 즐거웠던 하청면 대곡마을 최가의 막내.
장목면 송진포초등학교에서 수업하던 중 징집돼 멋모르고 제주까지 끌려간 1951년.
교사였단 이유만으로 하사관 교육을 받은 최종겸 어르신(91·사진 가운데)은 전쟁의 참상은 뒷전이고 제주에서 벗어나고 싶고 육지도 구경하고 싶은 철없는 23살이었다.

하사관 교육은 받기 싫고 육지는 가고 싶은 마음에 선배들의 "육지 가는 순간 죽음"이라는 말도 들리지 않았던 어르신. 하사관 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철원에 당도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

최 어르신은 "해가 뜨면 위로 진군하기 바빴고, 해가 지면 후퇴하기 바빴다"며 "날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위로는 총알이 날아다니고 옆에 있었던 동료의 죽음은 일상이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이대로는 곧 죽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던 현실 속에서 최 어르신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의 약속. 어르신은 "집안에서 막내일뿐 아니라 문중에서도 막내였던 내가 징집돼 끌려간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쫓아오면서 눈물을 흘렸다"며 "어머니에게 웃으면서 보내줘야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니 어렵게 눈물을 그치시고는 웃어 보이시더라.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은 1953년 7월27일 휴전이 선고되고도 쉽지 않았다. 지리산 경비대대로 근무지가 옮겨진 최 어르신에게 거제도포로수용소 경비로 차출돼 거제에서 15일 동안의 경비군 생활은 악몽과도 같았다.

최 어르신은 "고향에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쁨도 잠시, 선임들이 거제도포로수용소 앞에 도착하자 '철모부터 써라'고 했을 때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내리는 순간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있던 모든 포로들이 우리를 향해 각종 돌멩이를 던졌다"며 "가장 강했던 지리산 경비 대대가 거제에까지 내려와야 했던 이유가 설명되는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전쟁터에서 적군이 된 남과 북의 치열한 전투는 몰라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북한 포로들을 향해 칼과 총을 내미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최 어르신은 "만약 그때 포로 난동을 진압하지 못했다면 거제는 쑥대밭이 되고 남북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이들이 좋고 가르침이 즐거워 선생이 됐던 최 어르신은 3년여가 넘는 전쟁을 겪으면서 전쟁 난리통속에서도 '원리원칙'대로 움직이는 군에 매력을 느꼈다. 그 강한 매력은 최 어르신을 19년 동안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하게 만들었다. 1969년 육군대위로 전역해 고향에 내려와서는 1970년부터 15년 동안 거제시 하청면 예비군 중대장을 역임했다.

최 어르신은 91세에 또 다시 꿈을 꾼다. 최근 평화 기조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며 말을 끊으면서도 "평화는 곧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는 어르신.

"거제지역에 설치된 충혼탑은 지역민이나 관광객의 삶과 가까이에 있지 않고 다 외지에 있다"며 "국가는 외면해도,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위급한 순간 달려가 청춘을 다 바쳤던 지난날의 우리 청춘을 지금의 청춘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행정과 시민들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희생에 대해 청춘들에게 존경과 배려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에 이르는 역사의 한 순간 나를 비롯한 내 전우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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