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숙 거제스토리텔링 작가협회 회장
서한숙 거제스토리텔링 작가협회 회장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막 스무 살이 될 때였다. 버스에서 내려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갑작스레 나타난 그가 말을 건넸다. 버스 안에서부터 곁눈으로 나를 지켜보다가 따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우리의 만남이 시작된다. 나는 부산, 그는 서울에서 살았던 터라 만난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짬짬이 안부편지를 주고받다가 방학 때 한두 번씩 만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전무후무한 연인이 된 적이 있다. 부산의 '숙이' 보러 온답시고 그의 '서울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때 그는 그들 앞에서 내가 마치 그의 피앙세인 양 우쭐대면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한 살 아래라는 이유로 그를 '친구'라는 울타리로 단단히 묶어버렸다. 만날 때마다 의도적으로, 강조라도 하듯이 '누나'라는 고리를 걸었다. 친구이상으로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서 다독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의 감정은 쉬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속에 뿌리박힌 고정관념 또한 벗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득불 나는 그와 이별선언을 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날로부터 삼십 년이 지난 즈음, 난데없이 그의 전화를 받았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나를 찾았다고 하면서, 이제는 연락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서른도 마흔도 지나고 지천명까지 훌쩍 넘어섰는데, 무슨 큰 문제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근황을 들려준 그는 내 근황을 일일이 챙겨서 물어보았다. 마치 손윗사람인 양 그동안 잘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면서 내가 그의 '첫사랑'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지난날 애써 그를 뿌리치고 돌아섰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의 순수를 외면하고 눈물까지 흘리게 한 내가 바로 그의 '첫사랑'이라는 게 아닌가. 급기야 나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말문을 열었는데, 이는 내 속에 지문처럼 박혀있던 마지막 순정이었다.

그로부터 내 스무 살의 로망은 삼십 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억 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서로 달랐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어색해 진땀을 흘리는 장면을 떠올렸고, 그는 나와 입 맞추기를 하다 뺨을 맞고 돌아서는 장면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가 재생한 그 장면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날의 해프닝이 떠오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보를 터뜨린다고 했다.

그 시절의 해프닝은 풋풋한 날들의 기억과 함께 나를 정지된 시간 그 너머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도 여전히 떠올랐다. 시간과 시간의 경계선이 허물어져 난처할 노릇이었다. 부득불 그가 내 안에 들앉은 이유를 살펴야 했다. 가까운 친구에게 이를 말하자, 내가 무언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기야 그것은 나의 착시현상이겠지만, 지천명을 넘긴 내 삶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지난 삼십년을 단숨에 걷어내고 스무 살로 돌아가게 하듯이 다시 또 삼십년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찌하랴. 첫사랑의 환상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금 그와의 이별선언을 한다. 내가 그를 떠나는 것은 첫사랑의 환상을 깨뜨릴 것 같은 조바심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 이미 깨졌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떠나는 것은 그의 첫사랑의 환상을 삼십년 더 연장하고 싶은 미련 때문이다. 내 스무 살의 로망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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