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거제시립박물관 들어서는 '둔덕면'…어떤 역사 지녔나①
현 둔덕면 마을 20곳 가운데 9곳 고려에서부터 내려져와
고려 의종 유배지 덕에 고려왕실 유물 자산이 함께 간직

고려시대는 조선이 건국되면서 그 사료가 대부분 불에 타 사료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고려시대 왕실 사료가 남아 있는 둔덕면은 길거리 돌부리도 무심코 버려선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고려시대의 기성현지(현 거제면과 다름), 의종 피난 역사와 기성 축성, 의종이 머물면서 남긴 왕실 사람들의 흔적은 거제지역 뿐 아니라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소중한 고려의 흔적이다.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거제지역 각 마을 이름부터 고려 역사를 조금이나마 엿보고자 한다. 반대식 거제시의회 의장과 둔덕면사편찬추진위원회의 둔덕면사, 신봉근 동아대 전 총장이 기획에 도움을 줬다.  <편집자 주>


'거제 역사의 발상지 둔덕면'

둔덕면 20곳의 마을 표지석에는 마을 이름 위에 이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현재 둔덕면은 거제지역에서 청정지역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둔덕면의 역사를 살피면 거제 역사의 발상지라는 둔덕면민의 자부심이 이해가 된다.

둔덕은 선사시대 이후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이뤄진 역사와 문화가 발전되고 변모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둔덕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역사의 중심지로 서게 됐다. 의종이 무신의 난을 피해 거제로 오면서 임시 거처를 둔덕에 정하고 기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한때는 의종의 영향으로 폐왕성이라 불린 채 지방문화재로 등록돼 있었지만 현재는 둔덕기성으로 변경돼 제 이름을 갖게 됐다.

한 나라의 임금이 작은 현으로 피난 온 것은 주목할 만한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둔덕면민을 비롯한 인근 사람들도 의종을 추종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의종은 기성을 쌓아 3년간 망명정부를 수립해 다스렸다는 것도 추측이 가능하다.

고려시대의 둔덕은 의종이 3년 동안 거주하면서 역사무대에서 중요한 위치로 알려지게 된다. 의종이 둔덕 기성에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 나라의 왕이 무신들에 의해 거제도 둔덕까지 오게 된 것은 지금으로 치면 군사정권에 의한 쿠데타로 쫓겨난 꼴이다. 이 일은 고려사에 있어 아주 큰 사건이다. 또 고려 창건 이후 왕권 최대의 위기임을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의종은 1170년 8월에 정중부에 의해 거제 둔덕으로 쫓겨났고 그 후 이의민에 의해 경주에서 만 3년만에 죽임을 당했다. 그 3년 동안 의종은 둔덕면 거림리 우두봉 중허리에 거처를 정하고 기성을 쌓았다.

쿠데타로 물러난 임금이지만 다시 복귀해 왕권을 세우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투쟁은 3년 만에 결실을 맺으려 하지만 정중부와 김보당, 이의민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지금의 둔덕기성에서 보면 서쪽으로는 통영시와 다도해, 남쪽으로는 남부면, 북쪽으로는 사등면, 진해만 일대까지 볼 수 있다. 심지어 맑은 날에는 동쪽으로 옥녀봉과 국사봉까지 다 볼 수 있어 요새라 불릴 만하다. 그만큼 기성은 오야성과 이어주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런 이유가 의종이 거림리 우두봉 중허리에 기성을 쌓았음을 추론이 가능하다.

의종이 둔덕기성에 3년 동안 임시거처로 있으면서 둔덕면 거림리 일대는 의종과 연관된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둔덕기성
멀리서 바라본 둔덕기성

의종의 흔적

현재 둔덕면 지도를 볼 때면 산방산에서 남쪽에 위치한 안치봉은 의종의 대비와 관련된다. 별칭은 대비장 안치봉인데 거림리 산 186번지의 남쪽에 있는 산기슭에다 의종왕의 대비를 살게 했다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의종이 피난 당시 비장을 설치해 대비를 안주시켰는데 이를 총칭해 '대비장안치봉'이라고 했고 그 당시에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고려사를 보면 대비가 의종과 함께 거제로 왔음을 알 수 있다.

자주방은 하둔리 산 48번지와 거림리 191번지의 경계에서 둔덕평야로 이어지는 곳으로 예부터 일부가 수림이 울창하고 계곡이 깊었던 곳으로 의종이 둔덕 거림리에 기성을 방비하던 기관이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총은 방하리에 있는 의종을 따라왔던 문신이나 귀족 등의 가족들이 묻힌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1196년 파병부사였던 이의민이 삼족참영될 때까지 27년동안 개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제현에 살고 있었다. 늙은 백관이나 가족들이 죽었으니 방하마을 아래쪽 고름 등에 고려장지를 설치한 곳이 고려 무덤이다.

1912년 이 지역에서 여러 고려 무덤이 발굴됐는데 그 속에서 도자기 등이 나오면서 고려시대 사료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고종 때 제작된 거제부지도(부분). 둔덕이 비교적 자세히 나온 최초의 지도
고종 때 제작된 거제부지도(부분). 둔덕이 비교적 자세히 나온 최초의 지도

고려역사와 함께 하는 둔덕면 마을

둔덕면은 총 20개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이 가운데 8곳이 고려 역사와 함께 한다.

의종은 왕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폐위된 채 거제로 내려왔다 할지라도 그를 모시는 인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둔덕기성을 중심으로 의종의 가신들도 생계를 일궜을 뿐 아니라 의종이 언제 무신들이 거제에까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군수시설도 곳곳에 설치를 했다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군수시설로 쓰인 마을은 마장·죽전·하둔마을이다.

마장마을은 말을 키우는 곳으로, 죽전마을은 대나무가 많이 있는 특성을 살려 화살촉을 만드는 등 전쟁에 필요한 용품을 만들어냈다. 하둔마을은 군사 주둔지로 상둔·하둔 모두 군사 주둔지로 활용했다고 풀이된다.

술역마을은 둔덕면과 통영시를 연계해주는 포구로 물길을 뜻하는 의미기도 하다. 농막마을은 주식이 생산되는 농촌마을을 뜻한다.

의종이 거주했던 거림리는 순수 우릿말로 '현아지'로 불리었는데 큰 동네를 뜻한다.

이밖에도 산방마을과 방하·옥동마을도 이 당시에 붙여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 문헌에 첫 등장한 둔덕의 지명
경상도속찬지리지 문헌에 첫 등장한 둔덕의 지명

국내 유일 고려왕족 자산, 관광자원 활용 충분

둔덕면은 청마기념관과 청마꽃들축제 등 문화행사가 열리기는 하나 규모가 한정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민선 6기 공약사업인 거제시립박물관이 둔덕면민의 적극적인 부지 매입으로 활발하게 사업이 이뤄지다 국비 확보가 매번 엎어지면서 진행이 지지부진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고려 의종왕과 관련한 고려촌 문화체험길은 국내 유일무이한 길로서 충분히 관광자원 가능성이 있다.

반대식 거제시의회 의장은 "관광자원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보다 집적성이 중요"하다고 말문을 연 뒤 "둔덕면은 거제시립박물관과 청마 유치환 선생의 문학의 길, 고려촌 문화체험길을 연계한 사업을 마련해낸다면 충분히 관광자원으로 가능성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관광자원은 남들과 다른 타 지자체에선 할 수 없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할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다"면서 "국내에서 고려역사가 확실한 증빙 자료가 있는 곳은 거제 외에는 없다는 점, 거제시립박물관 국비 예산도 고려촌과 연계하면 사업성이 있다는 판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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