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태 바르게살기운동 거제시협의회장

"사람이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저는 이 문제에 대해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그 대답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에 벗어나지 않게, 그리고 함께 어우러지고 서로 베푸는 공동체로 삶을 공유하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입니다."

바르게살기운동 거제시협의회 제14대 회장으로 취임한 박성태(65·일운면)씨의 일성이다. 박성태 회장은 거제시 일운면이 고향이다. 매화꽂이 제일 일찍 피는 따뜻한 동네 지세포에서 태어났다.

"협회 이름만으로도 어려운 자리의 봉사자로서 얼굴이 되셨는데 어깨가 무겁지 않느냐"는 본지 기자의 질문에 박 회장은 "나는 운이 좋게도 정치망 사업에 성공하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분들이 대가족을 이루며 같이 살면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성장과정을 답했다.

"아버지(박명길 씨)께서는 늘 사람들에게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집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많이 드나들었고, 아버지는 오는 이들에게 베풀어주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모습이 제가 살아갈 모습이 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박 회장이 자라면서 보고 느낀 것이며, 자신이 살아가는 좌우명이 된 셈이다.

그는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운동을 좋아해 체육 선생님이 꿈이었다고 한다. 고등학생시절 핸드볼 선수였던 그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국가대표로 일본 오오기시에서 있었던 예선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본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배가 고픈 상태에서 경기를 했죠. 그리고 당시 한국에는 자동판매기를 볼 수 없었는데 일본에 있는 것을 보고 너무 신기했지요. 다행히 매일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끼니를 때우면서 경기를 했어요."

"살면서 올림픽 예선전에 국가대표 선수로 참가한 것은 커다란 영광이었으며, 추억이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충격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당시 재미있었던 것은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고현에서 지세포까지 '국가대표'라고 표기된 체육복을 입고 걸어가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검문소에서 무사 통과였지요. 국민들과 경찰들이 국가대표를 예우해 줬던 것 같습니다"면서 "평창동계올림픽을 보면서 그때가 추억 속에서 스쳐지나간다"고 웃음 지었다.

박 회장은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수산업을 시작했다. 살아가는 동안 큰 굴곡이 없었다. 운동을 좋아해 거제시 각종 체육단체에서 활동을 했다. 거제도에 핸드볼을 보급하고, 그렇게 체육인으로 봉사의 길을 시작했다. 거제시 배구협회장을 지내면서 거제시에 배구를 적극 육성하기도 했다.

"언제나 나눌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지요. 모두가 선친께서 쌓은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르게살기운동 거제시협의회장이 된 것과 관련, 박 회장은 "바르게살기운동은 제가 짧은 시간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배울 것이 많았다"면서 "협의회에는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는 도구들과 회원들이 있다. 이번 바르게살기 여성농악대는 설날 지신밟기를 통해 모은 성금으로 지역 어르신 생신잔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이어 "바르게살기 거제시협의회는 탄탄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다"며 "18개 읍면동 위원회와 협의회 회원들이 더욱더 상생 할 수 있는 협의회로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설명했다.

박 회장은 자녀에 대한 질문에 겸연쩍으면서도 자랑스러운 듯 "큰아들은 베이징 관현악단에서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호주에서 여행사와 환경업체 등 여러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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