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아무 생각없이 걸어보자고 나온 밤길이 자꾸 불안하다. 몇 시간쯤 참아보기로 하고 달빛 좋은 길을 다시 걷는다. 많이 걷겠다는 새해 다짐만 2년째다. 생각만 하다가 작심삼일이나 작심삼월쯤 되는 날 양심에 형편없이 기울어진 나를 발견한다. 세상은 무거운데 세월은 얄짤없다.

세월이 빠를수록 허허로운 생각으로 걸음을 가져본 일이 드물다. 힘들겠지만 걷는 날마다 휴대전화를 버리고 다니기로 한다. 그런데 이유없이 불안하다. 며칠 전에는 휴대전화기를 집에 두고 출근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불안했던 적이 있다. 그게 뭐라고, 당장 급할 일도 없는데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찾거나 휴대전화가 없다는 것을 잠시 잊고서 호주머니를 만질 때마다 민망함에 쪼그라드는 얇은 실체를 발견하곤 했다. 아무튼 걷자고 나오는 길에 버리기로 한 휴대전화기가 돌부리가 돼 자꾸 걸려 넘어지는 마음이라니.

중독이다. 심각하다. 아직도 책상 앞에는 'SNS를 멀리하고 더 자주 걸을 것'이라고 적힌 작년 다짐이 붙어있다. 다짐에 미안해지는 불편 앞에 나약한 것은 인간뿐이다. 그런 인간과 떨어져서는 절대 안 될 것 같은 휴대전화가 있음으로 누구나 아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카톡, 카톡' 배달음이 끝나기 무섭게 아침마다 배달되는 명상과 교훈들, 관계에 좋은 말들, 음악과 영상까지 더해진 철학자의 행복조건, 그 좋은 그림과 말씀들이 공해가 되는 순간이다. 이런 것도 잘 만들면 상품이 되는 세상이지만, 어쩌면 그렇게들 글들을 잘 쓰고 그림까지 예쁘게 그려서 보내는지 따뜻한 정성에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새겨듣고 실천하겠습니다' 뭐 이런 답장을 보내며 머리를 조아려야 할 판이다.

일부러 나를 생각해 보내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그렇게 불행한 것도 아닌데 자꾸 행복해야 된다고 일러주니 감사할 일인지, 인생교훈까지 들먹거리면서 교만하지 말고 인생 헛되게 살지 말라고 잊지 않는 훈계에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인지 참 난처하다.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좋은 글을 그만 받고싶다고, 그만 보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해 살림 잘 하는 생활의 지혜, 사기 당하지 않는 법, 달라지는 교통법규 등 아침부터 듣게 되는 정보나 지식, 훈계나 충고가 사실은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 같다. 애정 섞인 관심이나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야 왜 모를까만, 그렇게 한결같은 모양으로 잘 만들어진 상품같은 훈계나 친절이 너무 흔해서 더이상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 그건 공해다.

툭하면 초대되는 '단톡방'에서는 빠져 나오기도 어렵다. 돈독한(?) 관계가 주는 신의를 버려야 가능한 일이다. 글을 읽지 않은 것까지 들통 나야 되는 불편한 사실, 원하지 않는 말싸움이나 의견을 끝까지 들어야 되고 귀찮아 나가기라도 하면 강제로 다시 초대돼지는 불편한 사실이 답답하다. SNS로 맺어진 운명 공동체도 아니고 무슨 윤리강령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편리함이 주는 불편함이다. 그냥 혼자 걸을 때만이라도 관계를 멀리하고 싶다.

동료가 '술 중독이야, 조심하는 게 좋을 걸!'라고 일러준다. 마시는 간격을 조절해가면서 챙기는 편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중독'이라는 말에 내처 없는 자존심을 구기기 싫어서 세상살기 불편하다는 핑계로 대충 버무린다.

그래도 걸을 때만큼은 버리기로 해 본다. 휴대전화기에 실린 주소록과 연락처, 은행을 가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기능들, 어느 누구에게서 닿을지 모르는 인연들, 메모장마다 적힌 단상들을 두고 다닌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불안한 마음도 조금씩 없어지고 시간의 여유도 많아 느긋해진다. 자주 드나들지 못했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미소를 천천히 관찰할 수 있어 좋다. 그런데, 가족 '단톡방'에서 아들 녀석이 아무 답이 없으면 또 궁금해지는 정말 불편한 사실,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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