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은 성은 김(金)씨로 64세라는 늦은 나이에 왕이 됐지만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신라'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권력자의 칭호였던 '마립간'을 중국식 '왕(王)'으로 고쳤다. 국가체제의 확립을 통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죽은 후 시호를 '지증(智證)'이라고 했는데, 시호제도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런 왕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왕의 음경이 무려 한 자 다섯 치나 돼 좀처럼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하를 나라 안에 널리 보내어 구하게 했다. 신하가 모량부(牟梁部)에 이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한 똥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이 똥의 주인을 찾았더니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하다가 눈 것이라 했다. 찾아가 보니, 딸의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였다.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맞아들여 왕후로 삼았다. 삼국유사에 나온다.

이 기록으로 보아 개는 신라 이전부터 사육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여러 지방에서 채집되는 개에 관한 설화들을 분석하면 대체로 개는 인간과 상통하는 영감적인 동물로 보고 있다. 백제가 멸망할 때 사비성의 개들이 일제히 슬피 울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옛날 경주고을에 어렵게 사느라고 유람 한 번 못하고 죽은 과부가 개로 환생해 자식들의 집을 지키며 살았다. 어느 날 중이 와서 그 개는 환생한 당신 어머니인데 팔도유람 한 번 하는 것이 소원이니 시켜주라고 했다. 팔도유람을 마치자 개가 발로 땅을 헤치면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곳에 개를 묻었더니 그 무덤의 발복(發福)으로 최부잣집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술에 곯아 들판에 누워 잠든 주인곁에 있다가 들판에 불이 나자 냇가로 가서 자신의 털을 적셔 불을 꺼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고 주인을 구했다는 '오수의 개' 이야기를 비롯해, 개의 충직과 의리를 알 수 있는 개무덤(義狗塚)·개탑(義狗碑) 등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개는 우리와 매우 친근한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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