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 수필가
이동우 수필가

지눌(知訥)은 고려시대의 고승이다. 불교개혁을 이끈 선구자(先驅者)이자 조계종의 창시자기도 하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선종(禪宗)보다는 교종(敎宗)이 위세를 떨쳤다. 교종은 교리를 읽고 그 진리를 깨닫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경전을 읽고 교리를 이해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으니 글을 읽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은 진리를 깨닫기 어려웠다. 당시 귀족들은 교리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자신들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다. 글을 모르는 일반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반면 선종은 교리를 읽고 이해하지 못해도 마음을 갈고 닦으며 선(禪)을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선종이 큰 환영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귀족중심의 당시 사회에서는 선종보다는 교종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선종은 고려 중기 이후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 이때부터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화됐다.

지눌은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주장했다. 선교 합일(禪敎 合一)이다. 선교합일을 내세우고 있는 조계종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기서 지눌의 업적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知訥(지눌)이라는 한자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知訥을 말 그대로 풀이하면 '어눌한 것을 안다'는 뜻이다. 무슨 뜻일까? 이 말의 유래는 중국 수나라 때의 왕통이 지은 '지학(止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학은 '멈춤의 지혜'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큰 지혜는 멈춤을 알지만(大智知止·대지지지) 작은 지혜는 꾀하기만 한다(小智惟謀·소지유모)'는 표현이 지학에 등장한다.

지자눌언(智者訥言)이라는 표현도 있다. 지혜로운 자는 말이 어눌하다는 표현이다. 지자눌언과 지눌의 '어눌한 것을 안다'는 일맥상통한다.

공자도 어눌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군자욕눌어언 이민어행),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는 뜻이다. 왕통의 '어눌하다'는 것과 공자의 '모른다'고 하는 것도 서로 닮아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는 것도 아는 체 해야 하고 모르는 것도 아는 체 해야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면 모자라 보이고 무지(無智)해 보인다. 그런 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러니 모르는 것도 안다고 해야 한다. 아는 체 해야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이 돼버렸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 '아는 것'이라는 공자의 말이 무색하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지식이 많은 것처럼 보이고 싶고 잘난 체 하려는 마음의 발로이다. '뽐냄'의 심리이다. 지자불긍(智者不矜)이라는 말도 지학에 등장한다. 지혜로운 자는 뽐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긍(矜, 자랑할 긍)이라는 한자는 지금까지 긍정적(肯定的)인 의미로 인식돼 왔다. 긍지(矜持)나 자긍심(自矜心)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그러나 이 단어를 풀이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긍지의 사전적 풀이는 '자신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가지는 당당함. 자랑'이다. 자긍심은 '스스로에게 긍지를 가지는 마음', 즉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돼 있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에는 '뽐냄'의 의미가 감춰 있다. 긍지와 자긍심이 지나치면 자칫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나 홀대로 둔갑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이유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긍지와 자긍심을 가지라고 강조하고, 이를 가르친다. 왕통은 뽐냄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면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자불긍이라고 말한 것이다.

마음속에 긍지와 자부심만 갖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지자불긍(智者不矜)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 아이들에게도 지자불긍(智者不矜)을 함께 가르쳐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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