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둔덕면 송곡마을에서 가톨릭 성지가 발견됐다. 송곡마을 어르신들이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노래가 있었지만 '서울하고 유 처자는~' 이 노래가 가톨릭 성지를 알리는 곡임은 최근에야 확인됐다. 호남 최초의 천주교 복자인 유항검 순교자의 딸 유섬이를 기리기 위해 김복희 의원이 기고했다.


김복희 거제시의원
김복희 거제시의원

거제의 명산 산방산 아래 송곡 안골 마을이 있다. 시집 와서 우물을 길어먹던 우물터가 동구 밖에 있고, 빨래를 방망이로 두들겨 빨던 개울이 지금도 맑게 흐른다. 송곡은 옛날부터 백씨 집성촌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사찰을 운영할 만큼 대를 이은 불교 마을이다. 전기도 전화도 없던 산골마을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흰 두루마기와 갓을 쓴 제주와 집안 아이들이 집마당에 가득했다.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고 밤새도록 제삿밥을 이고 날랐다. 산골바람에 살이 에이고 시린 발을 동당치길 때 짐승의 울음소리는 더 높고 하늘의 별은 무척이나 반짝였다. 그런 산골마을에 지금도 구전으로 내려오는 노래가 있다. 가톨릭 성지가 있다.

'서울하고 유처 자는 거제 섬에 귀양 왔네/아홉 살에 관비 되어 양 엄마가 키웠다네/아래 윗방 처녀들아 연줄삼아 구경 가세//유처 자는 양반 피라 목숨 같은 정절 지켜/흙과 돌로 토굴지어 이십오 년 살았다네/아래 윗방 처녀들아 연줄삼아 구경 가세//휘양전은 무엇이고 비단 옷은 누가 짖누/호남 최고 부잣집 딸 유 처자가 거제 선봉/아래 윗방 처녀들아 연줄삼아 구경 가세.'

이 노래의 주인공은 호남 최초의 천주교 복자 유항검 순교자의 '아우구스티노'의 딸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에 있는 유항검의 초남이 성지에 왔다. 출렁이는 황금 들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볕 좋은 언덕에 앉은 호박도 누워 쉬고 황소도 평화롭다. 한가로이 들길을 따라 걷노라면 고래등 같은 집이 첩첩이 성곽처럼 다가온다.

비바람에도 끄덕 않는 공덕비와 기념비가 무사처럼 서있다. 신유박해 때 천주를 믿다가 대역무도 죄로 일가족이 능지처참 순교한 유항검의 집이다. 부인 신희, 큰아들 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문석, 조카 종선과 무철은 문초와 혹형으로 죽었다. 배교와 밀교의 유혹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켜 순교했다.

그런 집안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유 처자는 나이가 어려 사형은 면하고 거제도로 관비가 돼 귀양왔다.

거제도 호부사로 지낸 하겸락의 사헌유집에 '곧고 깨끗한 정절을 지켜 원한 맺힌 마음을 신앙으로 극복한 섬이 처자가 죽으면 돌비로 그 이름을 새겨라'는 문헌이 발견됐다.

거제도 산방산 기슭에 40∼50가구의 동네사람들이 나무하러 다니던 바로 뒷산이다. 가시나무와 잔솔가지 속에 눈물자욱처럼 새겨진 '유섬이 처자 지묘'가 세상을 깨운다. 분상도 없이 비스듬히 누운 표지석은 백년을 기다린 정기가 서려있다.

나무 그루터기에 찔리는 아픔도 모른 채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은다. 아홉 살 어린나이에 부모형제를 잃고 귀양지 거제도에 끌려오면서 얼마나 무서워서 울었을까.

그가 흘린 눈물과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고통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는 나이에, 여성성을 위해 흙과 돌로 토굴을 쌓아 자신을 가두고 삵바느질과 먹고 버릴 통로 하나로 세상과 소통했다. 25년을 스스로 연단해 하느님 곁에 가까이 있기를 원했던 그의 신앙적 절개와 의지는 세상에 빛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지고 지순한 삶이 믿음의 본이 되고 노래가 돼 흐른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