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 칼럼위원 / 수필가

이동우 수필가
이동우 수필가

잇새에 낀 음식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이쑤시개를 찾았다. 뾰족한 끝으로 잇새를 쑤신다. 시원하다. 갑갑함이 사라진다. 작은 찌꺼기가 딸려 나온다. 괜스레 의기양양해 진다. 이쑤시개 하나로 의기양양해 질 수 있다니 신기하다. 이쑤시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의기양양해 질 수 있을까?

뇌리 속에 남아있는 이쑤시개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영화 영웅본색에 나왔던 이쑤시개다. 영화 속에서 주윤발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등장한다. 말을 할 때 이쑤시개를 좌우로 옮겨가며 입을 씰룩거리는 모습이 정말로 멋져 보였다. 이 모습에 반한 많은 한국 남성들 이 주윤발처럼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다녔다. 이보다 앞선 100년 전의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쑤시개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1890년대 하버드 대학을 중심으로 이쑤시개를 물고 식당을 나서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쑤시개 제조공장을 세계 최초로 설립한 찰스 포스터라는 사람의 판매 전략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쑤시개를 입에 무는 행위는 뭘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자 허세이다. 영화 속의 배우처럼 멋있게 보이려는 욕망, 일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고 나왔다는 허세가 이쑤시개를 물고 다니는 행위로 이어졌다.

이런 허세는 근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의 귀족들은 금이나 은으로 만든 이쑤시개를 들고 다녔는데, 이야 말로 허세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양반은 물을 마셔도 이빨을 쑤셔야 한다는 한국의 우수개 소리도 이런 허세와 일맥상통한다.

고도로 밀집된 현대 사회에서 이런 허세와 과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우월해 보이고 잘나 보이기 위해 사람들은 안간힘을 쓴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갖고 싶은 것. 바로 허세의 산물이다.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 집단의 허세는 더욱 발전된 형태를 띤다.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 오직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그들에겐 필요하다. 이쯤 되면 허세는 본능이 아닌 집착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현대 사회의 허세는 집착이며 인간의 끝없는 욕심의 산물이다. 허세의 당착이다. 다행히 인간은 이를 조절할 수 있는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 이성적인 인간은 허세를 경계하고 물욕을 경계한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쑤시개에 대한 또 하나의 이미지는 시골 들판에서 봤던 모습이다. 수십년 전에 뇌리에 박힌 모습이다. 그 당시는 일을 하다가 들판에서 밥을 먹는 게 일상적이었다. 여인네들이 집에서 밥을 해 들판으로 나르곤 했는데, 아주 특별한 날에 구운 김이 반찬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들기름을 발라 석쇠에 구운 김은 그 향기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가게 했다. 평소 맛 볼 수 없는 귀한 김을 사람들은 모두가 나눠 먹을 수 있도록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했다.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김을 꺼내 놓고 먹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때 이쑤시개 등장한다. 김의 한 가운데를 이쑤시개로 푹 찍어 고정해 놓으면 웬만한 바람에도 날리지 않았다. 매끈한 이쑤시개가 없을 땐 나뭇가지를 잘라 이쑤시개 대용으로 사용했다. 가게에서 파는 이쑤시개보다 즉석에서 만든 이쑤시개가 김을 고정시켜 놓기엔 더 적합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사람들도 나뭇가지를 잘라 잇새를 쑤셨다. 이때의 이쑤시개는 허세나 과시가 아니다. 음식을 먹고 나서 꼭 필요한 필수품이다. 소규모 집단의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허세나 자기과시는 필요 없다.

허세나 과시가 필요 없는 소규모의 공동체 사회. 어쩌면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류 공동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허세와 같은 현대 사회의 피곤함이 누적되고 쌓이다 보면 먼 미래의 인류는 이러한 소규모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귀할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