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좀 쉬어가자
가을, 좀 쉬어가자
  • 김계수 칼럼위원
  • 승인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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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수 거제시외식업지부 사무국장
김계수 수필가

봄은 빠르고 가을은 머뭇거림이다. 어 하는 순간 봄은 왔다 달아나지만, 가을은 바람에 순한 하늘의 구름과 여위어 가는 강물에서 흐느끼듯 떠는 윤슬과, 물 든 나뭇잎이나 여문 씨를 토하는 열매에 한참 동안이나 머뭇거리고 있다. 머뭇거린다는 것은 곧 떠날 것이며, 아주 한참이나 멀리 떠나 있을 것이라는 몸짓이다. 그래서 너무 빠르게 함부로 흘려보낸 봄과 여름이 이제야 들통 나고 아쉬워서 세상 곳곳에 빗나간 인연의 눈물처럼 가을은 물들고 있다.

가을은 기다리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좋다. 낮선 도시에서 보게 되는 낡은 여인숙 간판처럼 가을은 잠깐 설렘을 주기도 한다. 오래된 간판을 가진 여인숙 안에는 그래도 괜찮은 따뜻한 방 하나쯤 남아 있을 테다.

어느 손님 하나 없는 빈가게에서 붉게 물든 낙엽을 바라보는 나이 든 여인은 낯설어도 차갑지는 않다. 그녀의 시선과 함께 물든 낙엽도 함께 머뭇거리고 있을 테니. 떠나있을 때 보는 모든 배경은 내가 살아온 날들을 위해 이미 존재했던 것인데도 새롭게 여겨지고 낯선 두근거림을 준다. 살아가는 모든 것에는 배경이 필요한 법이고 나도 누군가의 절실한 배경이었으니까. 지치고 헐은 삶의 모든 배경 막을 걷어낼 때 인생 어디쯤 유랑하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래서 쓸쓸하지 않는다면 참 다행이겠다.

봄은 환한 얼굴로 오고 가을은 허름한 발걸음으로 익어간다. 일과를 끝내고 퇴근할 무렵, 모든 세상의 그림자가 서녘으로 모여들어 꽃 같은 구름은 저물도록 가득한데 바람은 벌써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차에서 내려 서녘으로 마냥 걸어가고 싶기도 하고 집에 들어가기에는 아무래도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횡단보도를 걷는 걸음들이 묵직하다. 약속이 없어도 아무나 붙잡고 밤술이나 기울이고 싶은 정이 감돈다.

주말마다 잡힌 약속들은 걷는 걸음보다 자동차를 타는 시간이 더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을 속을 걷는다는 것은 삶을 여물게 한다. 가을 속을 걷지 못하고 보낸다는 것은 늦은 밤 도로위에 직하하는 낙엽의 운명 같은 것이다. 가을 저녁 걷는 허름한 걸음은 좀 쓸쓸하기는 하여도 절대 낡지는 않는다. 모든 기기를 몸에서 털어 낸 조용한 걸음은 가을처럼 뒤돌아 떠나는 것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이제 그 예의를 가질 시간도 11월이 지나면 사라질 테니 부디 흐름한 걸음을 어서 걸었으면.

가을은 소홀한 사랑에 대한 반성이다.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곧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루만 더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기를 바라지만, 성큼성큼 물들어 내려오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하얀 벚꽃이 애기 웃음처럼 곱다지만 여름에서 겨울까지 검은 나무 몸뚱이는 잊고 지낸다. 산들 주변에 잎들이 무성하고 들꽃이 피었을 때 몰랐던 엉성한 차림새들이 잎이 지고 나면 맨 몸으로 드러나는 버려진 가구들이나 쓰레기들이 안쓰럽지 않던가.

우리 주변에는 항상 애기 웃음처럼 고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세상이란 것이 원래 팍팍하고 소홀해지기 쉬운 것이라며 미루어 온 사랑들이 얼마나 많을까. 얼마나 잊고 지냈을까. 나에게서 가을이 사라지고 나면 내 생활 주변에 허물처럼 섰을 소홀한 사랑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한다. 봄처럼 들떠 있지도 않아도 되고, 여름처럼 가볍지 않아도 좋으니 사라질 단풍에 머뭇거리는 시선처럼 좀 더 따뜻해져 보기로 하자.

남아 있는 모든 생에 가을은 낯선 인연처럼 다가오겠지만 입동을 지난 햇볕의 걸음처럼 빠르게 지나갈듯하여 서운하기도 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조용히 제 몸과 시간을 맡기는 산언덕 억새의 흰 빛깔처럼 겸허해지고 싶기도 하는 이 좋은 가을이 11월에도 그대로 남았으면 한다. 그래서 너무 채워서 아픈 마음속을 투명하게 비우고 여위더라도 행복하고 영혼이 맑아지는 허름한 가을 속이고 싶다.

가을, 조금만 더 좀 쉬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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