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길 청마기념사업회 부회장
김현길 청마기념사업회 부회장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집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바랑을 매고 탁발 온 스님 한 분이 오신 것이다. 그때 그는 곡식을 시주받았는데도 바로 가지 않고 나머지 염불을 끝까지 하고 돌아섰다. 그때 어머님이 궁금해 "그래가지고 하루에 몇 집이나 돌겠수?"라고 하자, 스님은 "누가 뭐래도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 탁발을 한다"는 말을 남겼다.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그 말에 감동한 나머지 스님이 머무는 절의 신도가 됐다.

그로부터 스님과의 연은 한 식구(食口)처럼 이어졌다. 스님의 배려로 뜻밖에도 나는 통영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학교를 절에서 다니게 된 셈이다. 절 이래야 도릿골 골짜기에 가정집을 개조해 부처님을 모신 절이었다.

그때 대처승인 아저씨는 암자의 주인이자 주지스님이었다. 나는 초파일날에는 아예 학교를 결석하고 까까머리 동자승으로 남아 스님을 도와야 했다. 절에서 통영상고까지 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처지라 멀고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몹시 힘이 들어 학교 근처에다 방을 옮겨달라고 생떼를 쓰기도 했다. 형편상 그럴 수 없었던 어머니는 나를 눈물로 달래곤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통영시 인평동 우룻개 김씨 문중묘가 있던 널따란 잔디밭에서의 봄 소풍이 내 학창시절의 마지막 날로 기억된다.

그렇게 만난 중 아저씨와의 인연은 사춘기에 접어든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때 나는 부처님을 모셔놓은 옆방에 자면서 새벽마다 아저씨의 염불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약속이나 한 듯 2층 양옥집 창문의 불빛 사이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곡인지도 모른 채 황홀한 선율에 빠진 나는 걸음을 멈추곤 했다. 그 곡이 '크시코스의 우편마차' 라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았다.

그런가 하면, 에나멜 비닐구두를 예쁘게 신고 2인 삼각 경기를 하듯 딱딱 발맞추어 걸어가던 갈래머리 소녀들. 좁은 골목길 그들과 등하굣길이 언제나 반대였던 나는, 죄 지은 사람처럼 비켜선 채 하얀 교복칼라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 때의 피아노 소리와 갈래머리 소녀들이 각인되어서인지 훗날 나는 딸을 통영여고에 보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였지만 대학에서 굳이 피아노를 전공하게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나는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던 중 아저씨와 동생들이 생각나 불현듯 도릿골 절로 찾아간 적이 있다. 친 아들처럼 나를 보살펴준 중 아저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부처님도 보이지 않았다. 언어장애를 겪고 있는 숙모님만 홀로 빈집을 지키고 있었으나, 연로하신 터라 내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당시 일곱 살과 다섯 살이었던 어린 동생 남매 또한 어디론가 떠난 뒤였다. 울컥하는 마음으로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나는 부리나케 산을 내려왔다. 당연히 늙으신 숙모님을 보살펴야 함에도 그럴 수 없었던 자신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가끔씩 통영에 가면 절간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도릿골 왼쪽 길을 돌아서 간다. 가물가물한 암자의 불빛 그 너머로 함께 뒹굴고 놀던 어린 동생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중 아저씨가 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지느러미도 제대로 제거하지 않은 명태국을 끓여놓고 코맹맹이 소리로 언제나 밥 먹으라 재촉하던 숙모님, 세월이 흐를수록 내 마음 속의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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