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칼럼위원

▲ 김철수 거제신문 서울지사장

요즈음 '내로남불'이란 말이 널리 인용되고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不倫)'이란 뜻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이는 사자성어도 아니고, 그냥 시쳇말의 줄임에 불과하다.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한 반면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굳이 사자성어가 필요하다면 '아시여비(我是汝非)'란 말이 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틀리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내로남불'은 이 시대 우리의 성정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말이 아니랴. 너나없이 이 말에 고개를 끄떡인다. 정권이 바뀌어 국회에서 열리는 공직자 인사청문회가 인구에 회자된다.

뉴스를 통해 볼라치면 가관이다. 위장전입과 탈세, 음주운전까지 범법행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후보들과 이를 질타하는 선량들의 모습들이 여과 없이 중계되곤 한다. 또 이들 후보자를 감싸는 선량들의 모습은 고슴도치에 비길만하다.

이 시대에 이 땅에 사는 사람치고 이런 잣대로 청문회를 연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통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이런 공직 후보자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선량들이 몇 명이나 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입장이 달랐다. 이제 서로의 위치가 바뀌어 공격과 방어가 뒤바뀐 형태다. '내로남불' 누가 만들어 낸 말인지 절묘하기 그지없는 시쳇말이 아니랴. '내로남불', 어원을 한 번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싶다.

로맨스(romance), 남·여 사이의 사랑이야기 또는 연애사건. 로맨스의 사전적 의미다. 이 말은 고대 로마어로, '로마스럽다'는 뜻이었다. 이 말을 널리 유행시킨 사람은 11세기의 남 프랑스의 청년 음유시인이었던 '트루바두르'이다. 그는 중세 십자군전쟁에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지내던 귀부인들에게 접근했다.

'트루바두르'는 참전 기사들의 무용담을 시와 노래로 만들어서 부인들에게 들려주며 환심을 샀다. 듸의 작품은 라틴어가 아닌 로마 평민들의 말, '로망어'로 씌어 있었다. 그래서 주로 운문으로 된 중세기사의 이야기를 '로망스' 라고 한 것이다.

한편 불륜(不倫)은 '인륜에 어긋남. 도덕에 벗어남'이 사전적 의미다. 주로 비정상적인 사랑이나, 인륜에 벗어난 애정행각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쁜 의미임에 틀림없다. 물질만능의 사회가 빠르게 형성되면서 도덕적해이가 심화됐다.

그런 결과로 불륜이 우후죽순처럼 노출될뿐더러 활개를 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도덕적으로 대칭을 이루는 '로맨스와 불륜'을 엄연히 구별해야 하는 것이 사회 규범이다. 그럼에도  경계를 허무는 사회풍조를 빗대 생겨난 시쳇말이 '내로남불'이다. 행위자체의 구별이 아니라 행위를 하는 당사자에 따라 잣대를 다르게 대는 이상한 논리가 아닌가.

나의 잘못은 하나도 인지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욕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나의 잘못됨을 먼저 알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단점이 있다.

그런데 나의 단점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단점이 있다고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단점이 있으므로 남의 잘못을 비판하고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노마드(nomad)의 특징 중하나는 단축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국적불명의 언어들이 난무한다. 인터넷상에 문자인지 기호인지 분간 못할, 암호 같은 언어들이 많다. 그네들이 즐겨 사용하는 줄임말이 많이 유행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에는 위트가 있고, 귀여움이 있으며 시대를 풍자하는 해학도 있다. 그런데 '내로남불' 이란 이 말은 기성세대가 자기변명을 위해 만든 신조어일 뿐이다. 영 마음에 안 든다. 우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포장되지 않은 언어여서일까.

'내로남불'이란 시쳇말을 통해 우리는 삶을 관조하며, 남을 비판하기 이전에 나를 되돌아보는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