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오후 6시라 아직 일러 사무실에서 시간이 될 때까지 미기적대다가 정작 6시가 돼서는 약속은 까맣게 잊고 아무 생각없이 집으로 간다. 집에 가서야 비로소 기억해 낸다. "아! 맞다. 오늘 약속 있었는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도시가스 검침안내가 붙어 있다. 집에 들어가면 그것부터 먼저 적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출근하면서 엘리베이터 게시판을 보고야 "아! 이놈의 건망증"

책상 옆에 서류를 두고도 그걸 찾느라고 허적거리고, 손에 자동차 열쇠를 들고 열쇠 찾는다고 허둥거리고, 에어컨을 잘 끄고 나왔으면서도 안 껐다고 생각하고 다시 집에 되돌아 가보면 얌전하게 꺼져있을 때의 허망함은 "아이고, 이 바보야"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보다 더 답답한 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얼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입안에서 뱅뱅 돌때다. "그거 있잖아" 하고 다그치지만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듣고 있는 상대가 더 답답하다. '거기' '그거' 같은 지시대명사만 쏟아놓고는 못 알아듣는다고 오히려 신경질 낸다. 영화 제목을 말할 때도 얼른 떠오르지 않아 "그 있잖아, 배우 누구 나오는 거, 제목이 좀 긴데, 그거 뭐더라" 이럴 때 첫 글자만 툭 던져줘도 "아! 맞다" 하고 무릎을 친다.

이런 현상은 인지기능이 뇌질환 상태인 치매나 잘 잊어버리는 건망증과는 다르다. 고유명사가 생각날 듯 말 듯 하면서 애를 태우는 설단현상(舌端現象)이다. 정보는 기억하고 있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사실을 말하려고 할 때 갑자기 말문이 막히면서 혀끝에서 빙빙 맴돌기만 할뿐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말을 버벅거리는 것과는 다르고,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낱말을 틀리게 하는 말실수와도 다르다. 중년이 되면 설단현상에서 건망증으로, 건망증에서 치매로 번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데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나라와 수도 이름을 줄줄 외우지 못해도, 툭하면 깜빡거린다 하더라도 그런 현상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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