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귀식 시민리포터

▲ 민귀식 새장승포교회 목사

조선 중엽 명종시대에 황소고집을 가지고 있었던 무식한 사람과 나름대로 자신이 유식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주막에서 만났습니다. 술을 한 잔 하게 된 두 사람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뜻하지 않게 다툼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황소 같은 고집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4X7=27'이라 주장했고, 자신이 유식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을 했습니다. 한참을 다투던 두 사람은 고을 원님께 찾아가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고을 원님이 두 사람을 한참 쳐다본 뒤 황소고집을 가진 사람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가 진정 '4×7=27'이라고 말을 했는가?" "예. 그렇습니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28이라고 계속 우기지 뭡니까?"

그 대답을 들은 고을 원님은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곤장 열대를 쳐라!" 그랬습니다. 그러자 무식한 사람이 자칭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향해 '바보같은 놈'이라고 핀잔을 주고 자리를 떠났고, 28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 열대를 맞았습니다.

곤장 열대를 맞게 된 사람이 시시비비를 가려 준 고을 원님께 자신의 주장이 옳았다고 항변하면서 다시금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고을 원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4×7=27'이라고 말하는 그 우둔한 놈이랑 싸운 네놈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가 어리석은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했다." 그러면서 말을 이렇게 이어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진실(眞實)을 말하고 옳음을 규명하는 일도 귀하고 소중한 일이지만 진실과 옳음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삶의 해답은 바로 '포용(包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당장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진실과 옳음을 잠깐 묻어두고 참된 사랑과 관용으로 형제와 이웃을 포용해주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보다 더 아름답게 하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간음을 하고 있든 그 현장에서 뜻하지 않게 잡혀오게 된 한 여인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돌로 쳐 죽이려는 무서운 군중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의 행동에 반대를 표하시며 사랑과 관용을 나타내셨습니다.

지금도 중동사회 속에서는 이 살인제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율법이 금하고 있는 죄, 그 죄를 지은 여인을 향해 법대로 군중들이 돌을 던져 죽이는 잔혹한 처형방법이 그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율법을 쫓아 처형하는 것보다 사랑과 용서의 자세인 관용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저지른 죄를 정당화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이 흐르고 난 이후, 많은 사람이 들었던 크고 작은 돌덩이를 내려놓고 그 현장을 떠났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을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예수님은 범죄한 여인, 준엄한 율법을 어기고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던 그 여인을 향해 당시 성행하고 있던 율법적 잣대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다시는 그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고 엄히 명한바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등장하고 있는 장발장의 불행한 인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화시킨 것 또한 사회 정의나 나라의 법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주교로 등장하고 있는 미리엘 신부의 사랑과 용서를 담은 포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도 중요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 주님이 보여주신 너그러운 사랑과 불의한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갖는 것입니다. 그 가슴으로 세상을 품고 원망을 녹이는 따뜻한 시민이 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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